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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前대통령 서거]민주화의 거목 김대중, 그 파란만장했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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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거목'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고비를 넘지 못하고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입원했으며 같은달 29일에는 기관지 수술을 받은 뒤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이후 병환이 급격히 악화돼 이날까지 다섯차례나 고비를 넘겼지만 이날 끝내 서거했다.

민주화의 거목이자 정치 지도자인 김 전 대통령의 일대기는 파란만장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3시간 가량 떨어진 섬마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중농인 부친 김운식씨의 4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국민학교 4학년때 목포로 이사한 그는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한뒤 5년제 목포상업학교에 진학했다.

44년 봄 목포상업을 졸업한 그는 일제의 징집을 피해 목포상선에 취직했고 해방후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이 회사 관리인으로 사업수완을 발휘해 꽤 많은 돈을 벌었고 뒤이어 목포일보를 차려 언론인의 길을 걷기도 했다.

해방 직후 그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준과 좌익 계열인 신민당에 잠시 몸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좌익의 행태에 환멸을 느껴 곧 두 단체를 탈퇴했다고 해명했으나 이 전력은 그에게 평생을 따라다닌 '색깔론'의 원인이 됐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됐다가 총살 직전에 탈옥했다.

이어 그는 54년 3대 국회의원선거에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정치권에 진출했지만 고난의 연속이었다. 3대에 이어 4,5대에는 지역구를 강원도 인제로 옮겨 민주당후보로 출마해 잇따라 낙선했다. 61년 5월 5대 민의원 인제 보궐선거에서 가까스로 당선됐으나 사흘만에 5·16쿠데타가 발생하는 바람에 등원도 못해보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두 아들을 낳은 첫 부인 차용애씨와 사별한 것도 계속된 낙선으로 인한 시련 때문이었다. 김 대통령은 이 와중에 장면 박사를 만나 정치를 배웠고, 가톨릭 신앙을 얻게 되었다. 61년 제 5대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그마저도 5.16 쿠데타로 의원등록도 못해보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박정희 정권의 등장은 고난의 길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는 김 대통령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5.16후 군정기간 동안 세 차례나 투옥된 게 이를 말해준다. 62년 5월에는 현재의 이희호 여사(22년9월21일생)와 결혼했다. 그 당시 이희호 여사는 YWCA 총무였다.

63년 11월에는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때부터 그는 야당의 대변인이자 재경통으로 명성을 날렸다.

64년 4월21일 그가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를 막기 위해 본회의에서 행한 필리버스터(의사지연전술)는 아직도 한국 의회사에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의사진행 발언권을 얻은 뒤 무려 5시간19분 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발언을 계속해 결국 안건 상정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이른바 '필리버스터링'을 처음 시도한 것이다.

이런 여세를 몰아 70년 '40대기수론'을 내걸고 신민당 대통령후보경선에 나서 1차투표에서는 김영삼씨에게 뒤졌으나 2차투표에서 이철승씨의 도움으로 승리하는 대역전극을 엮어냈다.

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평생의 동지이자 경쟁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했으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실시된 70년대 대통령 후보경선에서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 후보에 지명됐다. 제1 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 후보와 맞대결을 펼친 결과는 95만 표란 근소한 차이로 석패였다. 4전5기로 이어지는 대권도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71년 ▲남북간 비정치적 분야의 교류 ▲4대국 안전보장론 ▲2중곡가제 실시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선거전에 뛰어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결했다. 그는 마지막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이번에 정권교체를 못하면 앞으로 선거는 없을 것이다. 박정희씨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고 경고했는데 이듬해 '10월 유신'으로 현실화됐다.

이후 故 김 전 대통령의 인생은 순탄치 못했다. 71년 총선 지원유세중 교통사고를 위장한 테러를 당해 지금까지 한쪽 발을 절게 됐고 이듬해 10월 치료를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가 거기서 유신을 맞는 바람에 귀국하지 못하고 망명했다.

73년 8월에는 도쿄(동경)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에게 납치돼 현해탄에 수장될뻔 했다가 미국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귀국해서 계속 가택연금상태에 있다가 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을 주도, 3년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가택연금은 10·26사태가 터지고서야 비로소 풀렸다. 80년 2월 사면복권된 그는 다시 정치현장에 뛰어들었으나 같은해 5월 전두환 장군이 이끈 신군부에 의해 체포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당시 "나는 이제 죽지만 이 땅에서 정치보복의 희생자는 나로서 끝나기를 바란다"는 유언겸 최후진술을 했다.

그후 미국 망명중에는 김상현씨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김영삼씨와 공동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다.

그는 85년 2월 2·12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국을 단행했다. 비록 김포공항에서 강제 연행돼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지만 그의 귀국은 '신당 돌풍'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 신당이 5공하의 어용야당 민한당을 패퇴시키고 결국은 흡수하는 쾌거를 이룩했다.이후 민추협 공동의장에 취임한 그는 직선제 개헌투쟁에 나서 87년 6월항쟁을 촉발시켰고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씨와 갈라서 평민당 간판을 달고 출마했던 그는 대선 패배후 야권분열의 책임 때문에 2선퇴진의 압력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88년 4·26총선에서의 '황색돌풍'으로 극적인 재기에 성공해 세번째 대권도전에 나서게 된다. 3당 합당으로 여당후보가 된 김영삼씨와의 대결로 진행된 92년 14대대선에서 '뉴DJ플랜'을 기본전략으로 임했으나 지역주의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하고 또 한번 고배를 마셨다.

김 대통령은 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한 뒤 눈물을 머금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아태재단을 만들어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애써 정치를 멀리 했다.그러나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그는 95년 6월 지자체 선거의 지원유세에 참여, 조순 씨를 서울시장에 당선시키는 등 파란을 일으킨 뒤 9월 민주당을 떠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어 실시된 96년 4월의 15대 총선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97년 12월 당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연합으로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후보를 누르고 제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그러나 그가 정권을 출범시킨 순간 우리나라의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에 돌입해 있었다.

취임 초기부터 외국을 상대로 외자유치에 적극 나서면서 외환보유고를 늘려나갔다. 또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북한과의 대화의 길을 텄고, 지난 6월 15일에는 남북정상 간에 6.15 공동선언문을 만들어냈다. 55년 분단의 역사가 다시 씌여지는 순간이었다.

이같은 故 김 전 대통령은 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승리한 뒤 실제로 정권교체를 이루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린 셈이다. 이때문에 당시 '대통령 환자'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IMF체제를 극복하고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의 위상을 높히기도 했다.

2003년 퇴임한 故 김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강연회 등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왔고, 일부에서의 평가처럼 약화되기는 했지만 민주당의 구심점으로서 위치를 공공히 했다. 최근에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아 주목을 받기도 했다.

민철기자 mc0716@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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