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서상혁 기자] 금융감독원이 11년 만에 열린 통화옵션계약(키코) 분쟁조정위원회에서 최대 41%의 배상비율을 내렸다. 시중 은행들이 각 기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상품을 권유한데다, 설명도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완전판매'를 인정한 것이다. 신한은행의 배상액이 150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13일 금융감독원은 지난 12일 키코 계약으로 손실을 본 4개 기업에 대해 분조위를 열고 최대 41%의 배상비율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배상비율의 최저치는 15%며, 평균치는 23%다.
◆대법원도 불완전 판매는 인정…시중은행, 설명의무·적합성 원칙 위반했다
키코란 환율변동에 따른 위험을 피하기 위한 환헤지 통화옵션 상품을 말한다. 미리 정해둔 약정환율과 환율변동의 상한선 이상 환율이 오르거나, 하한선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손실을 입게 된다.
키코에 가입한 수출 중소기업들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한국의 환율 급등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바 있다. 키코공동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키코로 인한 기업들의 손실 규모는 3조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분조위를 신청한 4개 기업의 손실액은 1천600억원 규모다.
대법원이 지난 2013년 최종 판결을 통해 상품 계약 자체의 불공정성이나 사기성은 인정하지 않았던 만큼, 이번 분조위에선 판매 과정에서 있었던 '불완전판매' 여부만 심의됐다.
당시 대법원은 "키코 계약이 불공정행위 등으로 무효라거나 사기나 착오로 인한 계약이어서 취소할 수 있다는 기업 측 주장은 모두 인정하지 아니한다"라면서도 "기업의 경영상황 등에 비추어 환헤지 목적에 적합하지 아니함에도 체결을 권유한 행위, 관련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아니한 설명의무 위반 행위에 대해 은행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다"며 불완전판매를 인정한 바 있다.
분조위는 은행들이 판매 과정에서 적합성 원칙과 설명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다. 분조위에 따르면 판매 은행들은 4개 기업과 키코 계약 체결 시 예상 외화유입액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던 한편, 타행의 환 헤지 계약을 감안하지 않고 과도한 규모의 환헤지를 권유·체결했다.
또 환율이 상승하면 무제한으로 손실이 가능함에도 이같은 위험성을 기업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금감원 관계자는 "은행은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금융기관에 비해 더 큰 공신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위험성이 큰 장외파생상품의 거래를 권유할 땐 더 무거운 고객 보호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라며 "이는 고객보호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볼완전판매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라고 설명했다.
◆최대 41%…파생상품 거래 많을수록, 규모 클 수록 배상비율 줄어들었다
이날 분조위는 4개 기업의 배상비율을 15~41%, 평균 23%로 결정했다. 적합성 원칙과 설명의무 위반에 대한 기본 배상비율 30%에 키코 사건 관련 판례상 적용된 과실상계 사유 등 당사자나 계약의 개별 사정을 고려해 가감 조정했다.
가중사유로는 ▲주거래은행으로서 외환 유입규모 등을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경우 ▲계약기간을 과도하게 장기로 설정하여 리스크를 증대시킨 경우 등이다. 경감사유로는 ▲기업의 규모가 큰 경우 ▲파생상품 거래 경험이 많은 경우 ▲장기간 수출 업무를 영위해 환율 변동성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경우 등이 고려됐다.
4개 기업에 대한 은행별 배상규모는 모두 255억원이다. 신한은행이 150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우리은행 42억원 ▲산업은행 28억원 ▲KEB하나은행 18억원 ▲대구은행 11억원 ▲씨티은행 6억원 순이다.
향후 금감원은 양 당사자에게 분조위 결정 내용을 통지해 수락을 권고할 예정이다. 은행과 기업이 20일 이내에 조정안을 수락하는 경우 조정이 성립딘다.
분쟁조정 신청을 하지 않은 나머지 키코 피해 기업에 대해선 추후 피해배상 대상 기업의 범위를 확정한 후 자율 조정 방식으로 분쟁조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키코 사건 당시 은행과 통화옵션 파생상품인 키코계약을 체결한 기업 중 오버헤지·불완전판매가 확인된 기업 범위 내에서 추후 결정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키코 사건은 사실상 종결됐다. 하지만 윤석헌 금융감독원장 부임 이후 키코 사건 재조사가 시작되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이날 금감원은 분조위 개최 이유에 대해 장기간 지속된 사회적 갈등 종결을 위해 조정안을 권고해 당사자간 화해 기회를 제공하는 게 분쟁조정기구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키코 분조위 위원장을 맡은 정성웅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키코는 10년전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 시작돼 지금까지 그 상처가 아물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사건이다"라며 "지난 2013년 대법원은 불완전판매로 인한 은행의 책임을 사례별로 인정했지만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유사 피해기업들의 구제 등에 있어 고객보호 의무를 다하는 데 미흡했다"고 밝혔다.
이어 "금융상품 판매 과정에서 소비자가 부당하게 입은 피해를 구제하는 것이야 말로 금융소비자보호의 핵심이다"라며 "금융은 신뢰없이는 존재하기 어려운 산업인 만큼, 소비자의 신뢰를 얻고 동반자 관계를 유지할 때 금융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이 담보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은행들이 이번 분조위 권고를 수용할지 여부도 주목된다. 분조위 결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오히려 은행은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서 배상을 하게 되면 배임에 해당될 가능성도 있어 소극적인 입장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주주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키코는 재판에서 은행이 승소했기 때문에 배상을 하게 되면 법적으로 다툴 여지가 생긴다"라고 설명했다.
기업 입장에서도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지나, 은행이 수락하지 않으면 별다른 도리가 없다.
앞으로 기업들은 분조위 결과를 바탕으로 은행과의 개별 협상에 들어갈 전망이다. 키코공대위 관계자는 "분조위를 신청하지 않은 나머지 기업들은 4개 기업의 사례를 가이드라인 삼아 은행과 개별적으로 협상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서상혁 기자 hyuk@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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