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가 상품가격 인하를 유도하기 위해 발족한 소비자단체협의회 원가분석팀이 '공회전'하고 있다. 기업들이 원가 분석에 필요한 자료를 내놓지 않고 있어서다.
기업 측은 "내부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업체들은 "누가 선뜻 제 목 조르기에 나서겠느냐"고 되묻는다. 재정부가 후방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강제성 없는 민간단체를 통해 대외비 자료를 요구한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원료 값 떨어지면 가격 내려라"
정부가 민간 단체를 활용해 물가를 잡겠다고 나선 것은 지난 1월.
재정부는 민생안정 차관회의를 통해 "(국제 원자재 가격이 크게 하락했는데도)한국의 물가하락 속도가 느리다"며 "태스크포스팀(TFT)을 구성해 최근 가격이 올랐거나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세 반영이 더딘 제품을 철저히 관리하겠다"고 했다.
재정부는 다만 "민간 자율 조정"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시장 간섭 논란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재정부는 이 때문에 부처합동 '물가관리TFT'를 만들고도 굳이 민간단체인 협의회 내에 원가분석팀을 구성하도록 했다.
공인회계사 포함 4인으로 구성된 분석팀은 서민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상품 가격의 등락 요인을 점검하는 데 목적을 둔다. 특히 수입원자재 비중이 크거나 독·과점적 산업구조의 영향을 받는 품목들이 중점 분석 대상이다.
재정부는 분석팀과 공조해 가격을 부당하게 올렸거나 인하 요인이 발생했는데도 내리지 않는 기업을 선별해 언론에 공개하기로 했다. 업계 간담회를 열어 상품가 조정도 유도하겠다고 했다.
◆기업들 "원가 자료 요구, 지나치다"
문제는 기업들이 전혀 협조할 의사가 없다는 점이다.
분석팀을 발족한 소비자협의회는 지난 2월 재정부와 함께 '원가분석을 통한 물가안정 간담회'를 열고 20개 남짓 생활용품 및 식음료 제조업체와 만났다. 원가 분석에 필요한 자료 제출을 요청한 자리다.
그러나 간담회 이후 한 달여가 지난 4일까지도 자료를 보내온 회사는 한 곳도 없다.
협의회 원가분석팀 이은지 간사는 "지난 2월 말까지 자료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자료 제출을 마친 기업은 없다"고 했다. 그는 "향후 언제까지 자료를 받을 수 있을지 역시 현재로서는 기약할 수 없다"고 했다.
기업들이 밝힌 자료 제출 지연 배경은 "내부 의견 조율"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예상된 일이라는 반응이다. 번거로운 작업 과정을 거쳐 가격 시비의 근거가 될 자료를 내 줄 기업이 어디 있겠냐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체는 "백 번 양보해 자료를 제출한다고 해도 복잡한 서류 작업이 골칫거리"라고 했다. 분석팀이 기업에 보낸 원가분석 질의서는 재료비와 노무비, 제조 간접비, 납품 단가 등 14개 항목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다. 팀내 회계사들이 납품 및 유통 마진을 계산하기 위한 데이터들이지만 기업들은 "요구 사항이 지나치다"는 반응이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자료 제출에 대한 거부감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제 밀 시세 폭등으로 소비자 가격을 조정했던 대한제분 측은 지난 달 간담회에서 "원가 공개는 주부에게 가계부를 보자는 것과 같다"며 "남편도 아닌 남이 보자고 하는 건 과도하다"고 했다.
롯데제과 측은 '밀가루 값이 올라 과자 값을 올렸지만 실속은 없었다'는 논리를 폈다. "매출은 늘었는데 영업익은 줄었다"고 했다. 이어 "여러가지로 어려운 외부 요인이 있음을 소비자들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빙그레 관계자는 협상력 약화를 우려했다. 이들은 "지난해 낙농가의 요구를 수용하느라 우유값을 인상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며 "원가가 공개될 경우 그런 요구가 더욱 거세질까 염려된다"고 했다.
세제 가격 인상 때문에 참석한 LG생활건강 측은 운신 폭이 넓지 않은 제조업체의 현실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사실상 가격 결정력이 유통 업체에 있는 상황"이라며 "세제 값이 많이 올랐다고 하지만 원가가 오르고 각종 행사 상품을 내놔야 하는 제조업체도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했다.
◆환율 급등… 분석팀 설자리 좁아져
결국 기업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자료 제출을 미루면서 분석팀은 가동 한 달이 다 돼가도록 분석할 원가 자료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반짝 하락세를 보였던 환율은 11년 전 환란 당시 수준까지 치솟았다. 뒷짐지고 있던 당국이 잇따라 개입하면서 급한 불은 껐지만 언제 다시 달러당 1천600원선을 넘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2월 말 현재 시카고 상품거래소(CBOT)의 밀 가격이 52주 전 대비 56.3% 하락하고, 중국 달리안 상품 거래소의 대두 가격이 30.0% 떨어지는 등 국제 곡물가격이 크게 떨어졌지만, 급등한 환율이 시세 하락 분을 상쇄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업들은 지난해 원자재 가격 상승을 들어 상품가를 높였다. 이번엔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자 환율이 올랐다. 원자재 가격이 절반 이상 급락했는데도 높은 상품가격을 유지해야 할 대외 여건이 조성된 셈이다.
반면 분석팀은 기업과의 논리전에서 '환율과 원자재 가격 하락 반영' 중 전자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원자재가 하락을 근거로 상품가 인하를 권고하기엔 환율 상승폭이 만만치 않다.
재정부 이종화 물가정책과장은 "국제 원자재가 하락분을 고환율이 상쇄해 사실상 밀가루 등은 통관 가격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라며 "원가 분석 이후 공개 대상 상품을 선정해 하나 씩 알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계획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어려운 시기에 물가를 잡겠다며 민관이 손잡고 발족한 원가분석팀. 그러나 기업들이 버티기로 시간을 버는 사이 대외 환경이 급변하면서 분석팀은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앞으로도 순항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분석팀이 종래에 변종 전시행정의 산물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비관론이 슬슬 고개를 드는 이유다.
/박연미기자 change@inews24.com·정은미기자 indiu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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