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로 삼성전자가 대규모 투자 결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판단되면 국가가 (사면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전쟁 속에 장수가 없어 내부에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게 돼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을 그저 지켜봐야만 할까요?"
이달 15일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서 만난 이창한 상근부회장은 최근 국민 여론으로 확산된 '이재용 부회장 사면 요청'에 대해 묻자 이같은 입장을 내비쳤다.
이 부회장은 "최근 삼성전자를 두고 외부에서도 보기에 투자 결정이 늦어지고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며 "삼성전자가 오너 부재에도 의사 결정이 잘 이뤄지는 시스템을 갖춰졌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현재 분위기로 보면 그렇지 만은 않은 듯 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다른 나라에선) 여포같은 각각의 장수가 칼을 들고 설치는 데 우리나라에선 조자룡같은 이가 나서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라며 "삼성전자가 중장기적으로는 오너 없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당장은 이재용 부회장의 존재가 필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 부회장이 이처럼 말한 것은 최근 반도체 시장을 둘러싼 각국의 패권 전쟁이 가열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특히 삼성전자가 오너인 이재용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에 발이 묶인 사이 경쟁사들은 신규 투자 확대를 통해 미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태다.
실제로 파운드리 시장 강자인 대만 TSMC는 올해에만 280억 달러(약 31조원)를 설비투자에 쏟아붓고, 3년간 1천억 달러(약 116조원)를 투자하겠다고 공언했다. 인텔은 파운드리 판에 복귀하며 200억 달러(약 22조원)를 들여 미국에 공장 두 곳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D램 시장에선 대만 난야가 3천억 대만달러(약 11조9천억원)을 7년간 투자해 10나노급 공장을 설립한다고 발표했고, 일본 소니는 1억 엔(약 1조원)을 투입해 추가로 지은 나가사키 신규 공장에서 이미지센서 양산을 늘리기로 했다.
또 최근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압박을 받고서도 발 빠르게 움직인 인텔, TSMC와 달리 삼성전자 최고경영진은 투자 계획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못했다. 이에 업계에선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가 글로벌 기업에 대응해 과감하고 신속하게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부회장은 "미국과 유럽은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를 겪으면서 자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 구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반도체 설비투자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세금 감면 등의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며 "중국 정부는 총 55조원 규모의 반도체 펀드를 조성해 반도체 기업에 대한 투자를 진행하는 한편, 기업소득세 10년 면제 및 원자재에 대한 무관세 정책 등을 발표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국내 중견 파운드리가 최소 1조~2조원이 소요되는 팹 증설을 기업자체 자금으로 감당하기도 어려운 상태로, 정부가 정책자금 마련, 생산 공정 확대 등을 위한 지원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며 "특히 반도체 산업 혁신을 이끌어 갈 우수 인재 양성과 국내 반도체 수요 공급망 안정을 위한 생태계 구축 지원, 국제 정세에 관한 정보 공유 등으로 기업들에게 우호적인 경영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이 부회장은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국가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만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시장을 이끌고 있는 업체들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메모리반도체 분야 시장점유율은 57%로, 글로벌 공급 체인에서 두 기업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현 상황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향후 미국의 중국 제재 방향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어떤 방향으로 반도체 산업이 전개될 지 현재로선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자동차용 MCU 공급 부족으로 인해 글로벌 자동차 생산 중단 사태가 발생한 것을 미뤄볼 때 중국 시안에 낸드 제조 공장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와 중국 우시에 D램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 SK하이닉스가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는다면 글로벌 ICT 산업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각 기업들이 인력, 기술 등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요소들을 강화해 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함과 동시에 정부 역시 선제적인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우위에 선 것과 달리 시스템 반도체에서 상대적이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기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은 D램 점유율 71.1%, 낸드 점유율 44.9%를 기록했다. 그러나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선 상황이 다르다. 시스템 반도체 강국은 미국으로, 점유율은 무려 60%다. 시스템 반도체 상위 15대 기업 중 인(26%)을 포함해 9곳이 모두 미국 기업이다.
또 파운드리 시장에서 한국의 10나노 이하 첨단 파운드리 점유율은 40%이지만, 일반 파운드리 점유율은 18%, 차량용 반도체 점유율은 2.3%에 그쳤다. 팹리스도 글로벌 상위 50개 기업 중 한국 기업은 1곳도 없고, 시장 점유율도 1% 미만이다.
이에 이 부회장은 국내 시스템 반도체 산업이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선 기업간 유기적 협력과 산업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 향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고급 설계 전문 인력 확보도 시급하다는 판단이다.
이 부회장은 "1개 기업이 설계와 제조를 모두 수행하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시스템 반도체 산업은 팹리스, 파운드리, 패키징 등 여러 기업들간 분업 구조가 일반적인 형태"라며 "이에 따라 팹리스의 설계 기술력, 파운드리 제조 경쟁력, 최종 수요기업과의 연계 등 산업 생태계가 하나의 유기적인 결합체가 돼 움직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전 세계 가전 제품의 과반 이상이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넘치는 자국 내 시스템 반도체 물량을 소화하다 보니 점차 '경험'이 쌓여 중국 시스템 반도체 산업도 함께 급속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나라도 가전, 자동차 등 다양한 산업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경험'을 자주 쌓음과 동시에 석박사급 고급 인력 양성에도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달 발표할 것으로 보이는 정부의 'K반도체 벨트 전략'과 관련해선 반도체 업체들이 건의한 내용이 충실히 반영돼야 할 뿐 아니라 반도체 산업 성장을 위한 특별법 제정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반도체 업계는 지난 9일 산업부 장관과 협회 회장단 간담회에서 건의문을 전달하고 향후 정책에 반영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건의문에 담긴 주요 내용으로는 ▲국내 반도체 제조시설 구축 확대를 위한 전폭적인 지원 요청 ▲반도체 산업 혁신을 이끌어 갈 우수한 인재 양성 및 공급 ▲국내 반도체 수요 공급망 안정을 위한 생태계 구축 지원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능동적 대응을 위한 정부 지원 등이다.
이를 바탕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직접 주재한 확대경제장관회의를 통해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또 더불어민주당은 반도체 지원 특별법 제정을 위해 다음달 4일까지 한국반도체산업협회 회원사들을 대상으로 의견 수렴에 들어갔다. 지난 23일에는 반도체기술특별위원회도 출범시켰다.
더불어민주당은 오는 8월까지 반도체 산업에 대한 두 자릿수 세액공제와 반도체 시설 허가 패스트트랙 적용, 규제완화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법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이 부회장은 "미국, 중국 등 주요국들은 반도체산업육성을 위해 관련 법안을 제정하고 막대한 규모의 예산 지원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며 "우리 정부도 지난 2019년에 일본 수출 규제 대응을 위해 '소부장 특별법'을 제정, 국내 소부장 산업의 경쟁력을 높였던 사례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국가 경제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을 육성·발전시키기 위해 인력 양성, 신기술 개발, 수요 창출, 세제 지원 등을 통한 산업 성장을 위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특별법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정부가 업계 의견을 면밀히 듣고 반영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최근 불거진 공급 부족 사태로 인해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에 대해 전 국민이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된 듯 하다"며 "협회에서도 각종 산업 규제 개선, 인력 수급 지원, 기업 성장 지원을 통해 회원사뿐 아니라 산업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함께 도울 것"이라고 역설했다.
/장유미 기자(sweet@inews24.com),사진=정소희 기자(ss082@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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