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재계 총수들이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글로벌 경영 환경 악화에 적극 대비하기 위해 '현장 경영'에 힘을 쏟고 있다. '코로나19'의 2차 대유행 가능성이 높아진 데다 미·중 무역 갈등, 한·일 갈등 심화 등 대내외적 이슈로 사업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부 총수들은 휴가도 반납한 채 사업장들을 찾아 나선 동시에 하반기 경영 전략 수립에 골몰하는 분위기다.
4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은 지난 1월 시무식과 동시에 경기 화성 반도체연구소 방문을 시작으로 이달까지 총 17회에 걸쳐 국내외 주요 사업 현장을 찾았다. 2018년과 지난해에는 글로벌 네트워킹 강화를 위해 해외 현장을 주로 점검했지만,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국내 사업장을 주로 점검하고 있다.
실제로 이 부회장은 지난 1월 설 연휴에 브라질 마나우스·캄피나스 법인을 방문한 후 2월에 경기 화성 극자외선(EUV) 전용 반도체 생산 라인 점검에 나섰다. EUV 공정은 극자원선 광원을 사용해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기술로, 삼성전자의 대표적 초격차 기술로 꼽힌다.
3월에는 구미 스마트폰 공장과 아산에 디스플레이 생산라인을 점검하고, 5월에는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을 찾았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중국을 방문한 첫 사례다.
6월에는 파운드리·시스템LSI·무선사업부 사장단과 간담회를 진행하고, 화성 반도체 공장과 반도체부문 자회사인 충남 세메스를 방문했다. 특히 지난달에는 현장 경영 속도를 더 높여 수원 사내벤처 C랩 간담회와 부산 전장용 MLCC 생산라인 점검, 온양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기술 점검 등에 나섰다.
재계 관계자는 "검찰이 수사위 판단에도 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과 관련해 이 부회장에 대한 기소 여부를 한 달째 결정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시라도 '초격차' 전략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이 부회장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다"며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1년간 경영 공백을 경험했던 이 부회장 입장에선 대내외적 압박이 커진 만큼 과감한 의사 결정을 위해 현장에서 다급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태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도 올해 국내외 여러 현장에서 '미래차' 개발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또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청사진을 실현시키기 위해 우버, 삼성, LG, SK 등 다양한 업체들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정 수석부회장은 재계의 경쟁 기업들과 적극 연대함으로써 '자동차'에만 머물던 주력 사업을 '모빌리티 솔루션'으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특히 5월에는 삼성SDI 천안사업장을 방문해 이 부회장과 처음으로 단 둘이 만나 눈길을 끌었다. 정 수석부회장이 삼성 사업장을 방문한 것은 이 때가 처음으로, 이 부회장과 차세대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개발 동향을 논의했다. 또 지난달 21일에는 이 부회장이 현대차그룹 연구개발 심장부인 남양기술연구소에 방문해 정 수석부회장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이들은 자율주행차와 수소 전기차 등을 함께 시승하며 친환경차,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로보틱스 등 미래 모빌리티 분야 협력 방안을 폭넓게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과 현대는 창업주 시대부터 서로를 라이벌로 여기며 전자 부문과 자동차 부문 등에서 경쟁을 벌여 왔다"며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전기차 배터리 개발을 두고 협력한다고 하는 것은 '위기 앞에 적은 없다'라는 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또 지난 6월 22일에는 임원진들과 함께 LG화학 오창공장을 방문해 주목 받았다. 이날 정 수석부회장은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만나 LG화학이 개발하고 있는 미래 친환경 배터리 기술의 적용과 방향성을 공유했다.
이후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달 7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도 만나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 기술 및 미래 신기술 분야 협력 방안도 논의했다. 두 사람은 단순 배터리 사업 협력을 넘어 미래 모빌리티 산업 전반에서 '합종연횡'을 모색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날 회동은 미래 배터리, 신기술 개발 방향성을 공유하는 의미 있는 자리"라며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들과 앞으로도 협업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로 취임 2년째를 맞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부지런히 주요 사업장을 방문하며 위기 대응에 나섰다. 특히 지난 2월에는 LG전자 서초 R&D 캠퍼스 디자인경영센터를 방문해 출시 예정인 상품들을 살펴봤다. 지난 5월 7일과 22일에는 LG화학 인도 공장과 충남 대산(서산) 공장에서 연달아 안전사고가 발생하자 직접 나서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 회장은 대산공장 사고가 발생한 직후인 5월 23일에 헬기를 타고 사고 현장을 찾아가 책임자들을 강하게 문책하고, 피해자 가족들을 위로했다.
또 같은 달 28일에는 출범 2년을 맞은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를 방문해 임직원들에게 혁신 기술 개발을 위해 과감한 도전을 할 것을 주문했다. LG사이언스 파크는 지난 2018년 6월 구 회장이 취임한 후 3개월 뒤 처음 찾았던 사업 현장이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과감하게 도전하지 않는 것이 '실패'라고 볼 수 있다"며 "사이언스파크만의 과감한 도전 문화를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6월 23일 경기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SK 2020 확대경영회의'에 참석해 전 계열사들에게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기업이 이윤과 함께 추구해야 할 사회적 가치들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또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SK의 에너지·화학 분야를 두고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가치를 반영한 친환경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아 혁신을 이뤄가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외에도 최 회장은 지난달 9일 경기 이천 SK하이닉스 본사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 현장 방문 행사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의 수출 규제 1년을 맞아 문 대통령이 국내 산업 현장을 점검하는 데 최 회장이 기업인 대표로 전면에 나선 것이다.
또 지난달 7일 충남 서산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생산 공장을 방문한 후에는 서산 육쪽마늘을 판매하고 있는 임시 매장도 방문해 판로가 막힌 전국 마늘 농가 돕기에도 앞장 서 눈길을 끌었다. 이달에는 'SK 이천포럼'에 참석해 미래 경영 전략과 방향성을 임직원들과 공유할 예정이다. 앞서 최 회장은 'SK 이천포럼' 홍보를 위해 'B급 개그'를 앞세운 홍보 영상에도 등장해 주목 받았다.
SK그룹 관계자는 "최 회장은 올해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수칙을 준수하기 위해 다른 그룹 총수들과 달리 사업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편"이라며 "화상을 통해 임직원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6년 중국의 사드 보복과 한·일 갈등 등에 따른 불매운동, '코로나19' 여파까지 고스란히 입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전 사업이 위기를 맞자 최근 주말 마다 각 계열사 사업장을 방문해 점검에 나서고 있다.
신 회장이 현장 경영에 적극 나선 것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난 5월 중순부터로, 같은 달 17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방문을 시작으로 24일에는 잠실 롯데월드몰, 롯데백화점 잠실점, 롯데월드, 31일에는 롯데백화점 본점을 살펴봤다.
6월에는 6일 롯데마트 광교점과 롯데하이마트 메가스토어 수원점, 13일 롯데프리미엄아울렛 기흥점, 20일 롯데백화점 노원점과 롯데마트 구리점, 27일 롯데백화점 인천터미널점 등 주로 유통 사업 현장을 둘러봤다. 7월에는 롯데제과와 롯데칠성 양산공장과 롯데아울렛 이천점, 롯데케미칼 여수공장을, 이달 1일에는 롯데슈퍼 프리미엄 공덕점을 강희태 롯데그룹 유통BU장과 함께 방문해 고객들의 반응을 살폈다.
재계 관계자는 "신 회장은 고(故)신격호 명예회장과 마찬가지로 한 달씩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셔틀경영을 해 왔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일본으로 건너가기가 쉽지 않아진 상태"라며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국내 사업장에 발걸음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재계 총수들이 국내 현장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최근의 국내외 경영 환경이 악화된 것과 무관치 않다. 또 '코로나19' 확산으로 각국이 빗장을 내걸면서 해외 사업장을 돌아보는 것이 쉽지 않아진 것도 한 요인이 됐다.
재계 관계자는 "국내외 경기 부진이 계속되고 있는 데다 미·중간 무역 갈등, 한·일 관계 악화 등에 따른 정세 불안정, '코로나19' 사태 장기화까지 겹치면서 총수들의 위기 의식이 커진 상태"라며 "'코로나19' 극복을 넘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는 총수들의 절박한 의지가 국내 광폭 행보로 표출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장유미 기자 sweet@i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