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지난 19일 99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발인식이 22일 오전 6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이날 발인은 신 명예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가족과 친지, 그룹 임원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용하고 엄숙하게 치러졌다. 오전 7시부터는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 8층 롯데콘서트홀에서 영결식이 열린다.
영결식은 묵념, 약력소개, 추도사, 헌화, 유족 인사말순으로 진행되며, 신 명예회장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도 영결식 중 상영된다. 명예 장례위원장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추도사를 맡는다. 이후 운구 차량은 롯데월드타워를 한 바퀴 돌고 떠날 예정이다.
신 명예회장은 고향인 울산 울주군 선영에 안치돼 영면에 든다. 신 명예회장은 생전에 부산과 울산,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주요 사업을 펼쳤으며, 40여 년에 걸쳐 해마다 고향에서 마을 잔치를 열 만큼 고향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드러냈다. 다만 신 명예회장의 고향인 둔기마을은 지난 1970년 대암댐 건설로 수몰돼 고인이 댐 인근에 별장을 지어 해마다 5월 초에 고향 사람들을 불러 이곳에서 잔치를 진행했다. 마을잔치는 2015년까지 이어졌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로 '한강의 기적'을 이끈 재계의 창업 1세대 시대도 저물게 됐다. 지난해 12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잇따라 세상을 등진 지 약 한 달만이다.
신 명예회장은 불모지나 다름 없던 한국 땅에서 산업의 기틀을 닦으며 경제발전을 주도한 인물이다. 1921년 경남 울산에서 5남5녀의 첫째로 태어난 신 명예회장은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1948년 도쿄에서 롯데홀딩스의 전신인 ㈜롯데를 창업해 종합제과업체로 키웠다. 처음에는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었으나 이를 기반으로 껌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가도를 달렸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인 1967년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자본금 3천만 원으로 서울에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제과 창립 직후 주요 일간지에 낸 광고에는 "'품질본위, 박리다매, 노사협조'를 바탕으로 기업을 통해 사회 및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기업 이념"이라고 밝히며 '기업보국(企業報國)'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후 신 명예회장은 식품뿐만 아니라 유통·관광·화학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롯데그룹을 90여개의 계열사, 매출 100조원의 재계 서열 5위 기업으로 키웠다. 또 초고층 건물에 대한 집념을 바탕으로 '서울의 랜드마크'가 된 123층 롯데월드타워도 30여 년간의 노력 끝에 완공시켰다. 롯데월드타워는 지난해 기준 1억 명이 찾은 서울의 명소가 됐다.
하지만 현역 시절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후계 구도 탓에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2013년께부터 신 명예회장의 건강이 나빠지자 기회를 노리고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2015년 7월에 '형제의 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롯데그룹의 복잡한 지배구조와 신 명예회장의 '손가락 경영' 등이 드러나면서 창업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로 인해 신 명예회장은 주요 계열사 이사직을 순차적으로 사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차남 신동빈 회장의 경영권은 공고해졌다.
또 신 명예회장은 두 아들과 함께 경영비리 혐의로 2017년 12월 징역 4년 및 벌금 35억 원을 선고받았다. 다만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은 면했으며, 법원으로부터 한정 후견인을 지정받아 지내다 영면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시게미쓰 하츠코 여사와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 차남 신동빈 회장,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와 딸 신유미 씨 등이 있다. 신 명예회장은 유언장을 별도로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장유미 기자 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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