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수기자] 최태원 회장이 맡고 있던 모든 SK계열사의 등기이사직에서 사임했다.
SK(주),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SK C&C 등은 21일 일제히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재무제표 승인, 이사 보수한도 승인의 건 등을 모두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최태원 회장은 이들 회사의 등기이사에 올라 있었고, SK C&C를 제외한 3개사는 대표이사도 맡아 왔다.
이날 주총에 앞서 최 회장은 지난 4일 등기이사에 올라있는 이들 계열사 등기이사직을 모두 내려 놓기로 하고, 이 같은 뜻을 이사회에 전달한 바 있다. 지난 14일에는 이들 3개사에 대표이사 사임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최 회장의 사임에 따라 SK(주),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는 각자대표 체제에서 각각 조대식, 구자영, 박성욱 단독 대표 체제로 전환됐다. 최 회장은 SK C&C에서도 사내이사로 재선임된 지 1년 만에 물러나게 됐다.
이번 주총을 통해 SK계열사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는 공식절차가 모두 마무리된 셈이다. 이로써 최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지만 돌연 SK그룹 회장 지위는 유지키로 하면서 논란의 불씨가 될 모양새다.
사실 SK그룹은 최 회장의 등기이사직 사퇴 결정이 알려진 뒤 그룹 '회장'직 유지 여부를 놓고 내부에서 혼선을 빚기도 했다. 하루이틀 사이에 말이 바뀌면서 언론사마다 서로 다른 기사가 나오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실제로 최 회장의 회장직 사퇴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불거진 것은 지난 5일. 당시 SK그룹 관계자는 이에 대해 "최 회장이 계열사의 등기이사와 회장 직을 겸해 온 만큼, 등기이사 사퇴에 따라 회장직에서도 자연스럽게 물러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다음날 SK측은 "등기이사와 회장직은 완전 별개로, 회장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이를 공식 부인했다. 회장직 사임을 거론할 단계가 아니며 실제 전혀 거론된 바 없다고도 전했다. 하루새 말을 바꾼 형국이 된 것. 앞서 말을 인용했던 언론사들은 오보 아닌 오보를 낸 셈이다.
결국 SK그룹이 내부 논의를 통해 확정한 최종 입장은 "최 회장의 부재가 불가피하지만 경영의 중심축으로서 상징적 지위인 그룹 회장직은 여전히 유지한다"로 정리됐다.
이는 SK그룹의 오너 리스크가 본격화된 시점에서 내부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만은 없을 듯 하다. 실제 오너 사태 이후 SK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등 경영변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심심찮았다.
물론 '회장'이라는 직위는 사실상 법적 효력은 없지만 상징적으로 그룹을 대표하는 자리다. 그룹을 정신적으로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는 회장 직은 등기이사 사임과 결부해 내려놓고 말고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게 SK 측 설명도 꼭 틀린만은 아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지난해 1월 31일 법정구속돼 수감생활이 만 1년을 훌쩍 넘겼다. 지난 2월말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확정받고 잉여의 몸이 된 지도 두달여가 다 돼간다. SK도 이같은 최 회장의 법정구속에 따른 경영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미 지난 2012년 말 '따로 또 같이 3.0' 체제를 도입하고,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대내외적으로 그룹을 대표하게 됐다.
그룹 회장으로 불렸던 최 회장도 3.0체제 이후 계열사 자율경영의 취지를 살린다는 뜻에서 대표를 맡고 있는 SK(주) 회장을 공식 직함으로 삼았다. 당시 SK 측은 각 언론사에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며 '최태원 SK(주) 회장'으로 변경해달라 요청도 했다.
이 때문에 최 회장의 계열사 등기이사 사임은 곧 회장직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공감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새삼 회장직 유지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SK그룹 측의 변화와 배경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러나지 못한 회장직…속내는?
최 회장이 그룹 회장직은 그대로 유지한다는 데 대해 벌써부터 여러 설(設)이 들린다. 재계 일각에서는 향후 경영 일선으로의 원만한 복귀를 위해 후일을 도모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한편으론 회장이라는 존재 자체가 구성원들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고, SK의 성장과 굵직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최 회장이 회장직을 유지하는 게 기업가치에는 도움이 된다는 계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현재로선 이번 결정에 최 회장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됐는 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오너의 경영공백을 메우기 위해 경영진들이 짜낸 궁여지책일 수도 있다. 다만 단순히 경영공백을 메우기 위한 방안이라면 설득력이 부족하다. 계열사 책임경영을 강조해 온 SK가 오너가 빠진 빈 자리에 이름 만을 올려놓는 게 대안이 될 지 의문이다.
'전가의 보도(傳家寶刀)' 라는 말이 있다. 대대로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보검이라는 의미인데 어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방법이나 수단을 뜻한다. 최근에는 긍정적 의미보다는 부정의 뉘앙스가 강해 상황이 불리하거나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들고 나오는 호구책을 빗대 말하기도 한다.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계열사 등기이사 직함에서 물러난 최 회장이 '회장'직을 계속 유지하게 된 것이 SK 측이 기대한 결과로 돌아올 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일이다.
당장은 스스로 내려놓았던 회장 직위를 자의든 타의든 다시 거머쥔 모양새만 됐다. 도의적 책임을 지고 경영에서 물러나기로 한 최 회장의 결정에 오해의 소지를 남긴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정기수기자 guyer73@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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