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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수호자' 특허, 탐욕스런 괴물로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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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뉴스24 선정 올해의 인물]세계 IT 시장 뒤흔든 '특허'

[김익현기자] 치고 박고. 또 치고 박고. 삼성과 애플. 스마트폰 시장 1, 2위 업체인 두 회사는 올 한해 쉴새 없이 싸웠다. 시장에서만 부딪친 게 아니었다. 법정에서도 1년 내내 싸웠다. 올 한해 IT 뉴스는 삼성, 애플로 시작해 '삼성 vs 애플'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아이뉴스24는 2012년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지난 해 스티브 잡스처럼 딱 떨어지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누군가 "올해 최대 이슈는 특허 아냐?"란 한 마디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별 다른 이견 없이 '특허'를 올해의 인물 자리에 대신 올려놓기로 했다. 올 한해 IT 시장에서 특허만큼 뜨거운 화제를 몰고 온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올 한해 IT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특허. 아이뉴스24는 올해의 키워드를 통해 특허가 IT 시장에 던진 메시지를 진단해봤다.

◆삼성-애플, 특허란 판도라 상자를 열다

지난 8월24일(미국 현지 시간). 실리콘밸리 인근 새너제이 시에 있는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법원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삼성과 애플 간의 역사적인 특허소송 배심원 평결 때문이다. 그날 배심원들은 예상을 깨고 애플에 '배상금 10억5천만 달러'라는 화끈한 선물을 안겨줬다.

배심원 평결 뒤에도 두 회사의 힘겨루기는 계속됐다. 한쪽은 "고의로 특허 침해한 제품을 시장에서 영구 추방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또 다른 쪽은 "배심원장의 치명적인 흠결이 드러났으니 배심원 평결 자체가 무효다. 재판 다시 하자."고 맞받았다. 두 회사의 공방은 언론을 통해 가감 없이 그대로 전달됐다.

결국 1심 최종 판결에선 극단적인 주장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루시 고 판사는 "삼성 제품을 영구 추방하라"는 애플 주장을 기각하면서 "문제 많은 평결을 받아들이지 말고, 재판을 다시 하자"는 삼성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성과 애플 간 소송은 특허가 IT 시장의 핫 키워드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이전까지 수많은 특허 소송이 있었지만, 삼성-애플 다툼처럼 전세계에 걸쳐 초대형 규모로 진행된 사례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실제로 두 회사 특허 소송은 올해 IT 시장의 최대 뉴스거리였다. 한국, 일본,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유럽 지역까지. 장소를 옮겨가면서 싸울 때마다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애플이 안방인 미국에서 완승을 거두는 사이 삼성은 유럽 지역에서 나름의 성과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영국에선 애플에 홈페이지 광고까지 하게 만드는 수모를 안겨주기도 했다.

삼성과 애플은 8월 끝난 '1차 대전'에 이어 갤럭시S3와 아이패드 최신 버전을 놓고 싸우는 2차 대전을 준비하고 있다. 2차전엔 안드로이드 맹주인 구글까지 물려 있어 1차전보다 훨씬 규모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허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삼성과 애플 뿐만은 아니다. 노키아,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등 주요 글로벌 대기업들은 저마다 특허를 무기로 경쟁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공격 무기가 될만한 특허를 손에 넣으려는 움직임도 거세게 일고 있다. 올 초 노텔과 코닥 등이 파산 신청을 하자 이들의 특허를 매입하려는 경쟁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특허가 시장경쟁을 좌우하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특허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혁신을 위해 마련된 특허 제도가 도리어 혁신을 방해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특허를 둘러싼 세 가지 풍경

왜 이런 비판이 제기되는 것일까? 특허 제도가 도입된 배경을 살펴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세 가지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자.

장면 하나.

때는 중세의 어느 수도원. 한 수도사가 음침한 골방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의 필생의 과업은 금을 만들어내는 것. 쉽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에 더 가치가 큰 일이다. 하지만 그는 늘 '보안'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누군가 자신의 연구 업적을 훔쳐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 수도사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더불어 그가 수 십년 동안 연구했던 노하우는 고스란히 사라져버렸다. 하루 아침에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지식이 돼 버렸다.

장면 둘.

1449년. 우티남이란 곳에 거주하는 존(John)은 자신이 개발한 유리 제조기술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중세 시대에 이런 노하우 공개는 이례적인 일.

존이 관행을 깨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공개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영국 국왕이던 헨리 6세가 존에게 기술 공개 대가로 20년간 독점 사용권을 부여해줬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의미의 특허제도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장면 셋.

파인애플사가 모자에 빨대를 달아 길 가면서도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한 특허를 출원했다. 그러자 맞은 편에 있던 S사 측이 "그게 무슨 특허냐?"고 강력 반발한다. 얼마 전 KBS 2TV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로 방영된 '이기적인 특허'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코너는 다소 황당한 아이디어들까지 특허 출원하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당시 이들이 던진 메시지는 단순히 개그 차원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2012년 현재 특허제도가 당면한 어두운 그림자를 잘 꼬집은 것으로 평가된다.

위에 소개한 세 가지 장면을 곰곰히 살펴보면 특허제도가 왜 도입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첫 번째 장면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도 접할 수 있는 이야기다. 중세 이전 많은 연금술사(혹은 과학자)들은 자신만의 노하우를 감추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누군가 기술을 훔쳐갈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중세 연금술사들은 금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은 필생의 연구를 통해 현대 화학의 중요한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실제로 연구한 많은 노하우에 비해선 그 기여폭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유의 비밀주의 때문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노하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특허 제도가 도입된 것은 이런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독창적인 기술을 개발한 사람에게 독점적인 권리를 부여해주면서 노하우 공개를 유도한 것이다. 특허가 혁신의 수호자로 출발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특허 제도는 특허권자와 공중이 서로 하나씩 주고 받는 것이다. 특허권자는 제한된 기간 동안 자신의 발명에 대해 독점적인 권한을 갖는 대신, 관련 기술을 공개해야 한다. 아울러 특허권 보호 기간이 끝나면 '공공 영역'으로 풀어놔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20년 동안 독점권을 인정한다.

특히 공개 명령은 강력하다. 특허법이 요구하는 공개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경우엔 특허권 자체가 무효 처리될 수도 있다. 애당초 특허제도의 출발이 '독점 권한'보다는 '혁신적인 노하우 공유' 쪽에 좀 더 무게가 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특허를 남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눈에 띈다. 혁신을 위한 공유란 대의보다는 '길목을 지키다가 덮치는' 무기로 사용하는 기업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개그의 한 코너로 방영됐던 '이기적인 특허'가 개그 속 얘기에 머무르지 않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높아지는 우려 목소리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들어 특허 전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IT 기술의 중심인 미국에선 특히 비판의 강도가 강하다. 소프트웨어 특허를 남발하는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지적까지 제기될 정도다.

미국에서 대표적인 특허 비판론자는 저명한 법조인인 리처드 포스너 연방 항소법원 판사다. 포스너 판사는 1970년대 미국 반독점 정책의 기초를 만들었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이런 비판에 동참했다. '모방자를 모방하다'란 칼럼을 통해 "미국 연방 항소법원이 지나치게 광범위한 특허를 인정하면서 다른 기업을 괴롭히는 특허 괴물을 탄생시켰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선 특허괴물들이 포스퀘어를 비롯해 페이스북, 월마트, 디즈니 등을 상대로 연이어 소송을 제기했다.

특히 인터넷 관련 특허에서 무차별 소송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스탠퍼드 기술 법 리뷰'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인터넷 관련 특허 소송이 그 외 부분에 비해 소송 건수가 10배나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 회계감사원(GAO) 역시 지난 해 미국에서 제기된 특허 소송 500건을 조사한 결과 특허괴물들이 연루된 소송이 약 40%에 달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난 2007년 특허괴물 연루된 소송 비중 22%에 비해 18%P나 증가한 것이다.

산타클라라대학 법대의 콜린 첸 교수도 최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FTC)와 법무부가 공동 주최한 특허 워크숍에서 올해 초부터 지난 12월 1일까지 제기된 특허 소송 중 61%는 특허 괴물들이 제기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5년 전까지만 해도 특허 괴물들이 제기한 소송 비율은 23%에 불과했다. 또 지난 해에도 45%로 절반 수준을 밑돌았다. 하지만 올 들어 특허 괴물들의 소송이 크게 늘어나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특히 심각한 점은 특허 괴물들이 신생 기업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첸 교수는 이날 발표한 논문을 통해 "5천만~1억달러 가량을 모금한 신생 기업 중 35% 가량이 특허 소송을 당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2천만~5천만 달러 가량을 모금한 기업들 중에서도 20% 가량이 소송에 휘말리면서 홍역을 치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지적재산권법 연맹 조사에 따르면 특허 소송을 할 경우 평균 부담하는 비용이 65만~500만 달러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다보니 첨단 산업 부문에서 돈을 노리고 특허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는 추세다. 최근 보스턴대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0년 이후 특허 괴물들이 소송을 통해 벌어들인 돈이 5천억 달러에 이른다.

◆괴물로 전락한 특허, 혁신 수호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

많은 국내 언론들은 삼성과 애플 간 특허 소송의 승패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에서 승패가 결정날 때마다 엄청난 기사를 쏟아낸다. 물론 국내 언론의 관점은 삼성 쪽에 좀 더 기울어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 언론들은 아무래도 애플 쪽에 좀 더 무게 중심을 둔다.

하지만 이제 특허는 단순히 어떤 기업 간 소송의 승패에만 관심을 가지기엔 너무나 무서운 괴물로 변해버렸다. 모르는 사이에 혁신의 수호자에서 '탐욕스러운 괴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특허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내놓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시민단체인 전자프론티어재단(EFF)과 유럽 해적당이다. 이들은 특허 제도가 혁신을 방해할 뿐 아니라 거대 기업의 시장 독점을 도와주는 존재로 전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또 특허권자에게 지나친 독점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시장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허 제도 자체를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EFF나 해적당의 주장은 다소 과격한 편이다. 하지만 체제 내에 몸담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특허 제도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치고 있다. 특히 구체적이고 명확한 노하우 대신 간단한 아이디어까지 독점적인 권리로 보호해주는 소프트웨어 특허권에 대해선 좀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는 비판이 힘을 얻고 있다.

최근 애플의 각종 멀티 터치 관련 특허에 대해 연이어 무효 판결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비판 여론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도 크게 그르지 않다.

IT 시장을 쥐락펴락하면서 탐욕의 화신으로 전락한 특허. 과연 2013년엔 혁신의 수호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

삼성과 애플 두 거대 기업의 '브레이크 없는 벤츠' 같은 특허 전쟁 승패 못지 않게 특허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에 대해서도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 이 과제는 정책 당국 뿐 아니라 언론들도 앞으로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익현기자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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