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혜기자] 당신이 어느날 운전 중 부주의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았다고 치자. 도로교통법 151조에 따르면 이런 경우 2년 이하의 금고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게 된다.
만약 벌금형을 선고받은 후 한 달 내에 500만원을 현찰로 완납하지 못한다면? 놀라지 말라. 당신은 교도소에서 최대 50일가량 노역을 해야 한다.
일부 경제 취약 계층의 이야기일까. '장발장은행'에서 운영 실무와 대출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무능력한 일부 사람들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한 환경에서는 누구나 경제적 약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을 잃거나, 나이가 들거나, 병에 걸리면 곧바로 경제적 무능력자가 될 수 있지요. 가혹한 현실이 이어진다면 당신도 내일 벌금을 못 내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지난해에만 환형유치(벌금이나 과료를 내지 않은 경우 노역장에 유치해 작업을 시키는 제도)된 사람이 4만8천명에 달했다. 이처럼 벌금을 낼 형편이 안 되거나 벌금 미납으로 교도소에 갇힌 이 시대의 장발장들을 돕고자 지난해 장발장은행이 문을 열었다. 장발장은행은 빵 하나를 훔친 죄로 19년간 복역했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의 이름을 딴 대출기관이다.
장발장은행은 지난달 29일까지 총 25차례에 걸쳐 383명의 시민에게 7억3천718만7천원을 무담보·무이자로 대출해줬다.
오 위원은 "인권연대에서 비교적 가벼운 범죄도 행정벌이 아니라 형벌로 처벌하는 현행법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는데 쉽지 않았다"며 "제도를 쉽게 바꿀 수 없다면 벌금을 빌려줘 피해자를 줄여보자는 취지에서 장발장은행을 설립하게 됐다"고 은행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장발장은행을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8명의 대출심사위원은 매달 70건가량의 대출 신청서를 검토해 대출 적격 여부를 심사한다. 전화 인터뷰를 통해 상환 의지도 확인한다. 소년소녀가장·미성년자·기초생활보장법상 수급권자와 차상위계층 위주로 우선 심사하되 죄질도 고려한다. 성범죄나 음주운전 관련해서는 대출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사정 어려워 상환 늦어져도 죄인 취급하지 않아"
대출 자금은 후원금으로 전액 마련된다. 지난달 29일까지 3천158명의 개인과 단체에서 총 6억865만2천340원의 성금을 보냈다.
"장발장은행에 보내주신 돈은 단 한 푼도 대출 외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습니다. 현행 기부금품법에 따르며 모금액의 최대 15%까지는 기부금품의 모집·관리·운영 등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수 있게 돼 있어요. 사실 은행을 운영하다 보면 각종 경비가 들지만 모두 인권연대가 부담하고 있습니다."
이어 오 위원은 "초기보다 후원 액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돈을 갚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대출 여력이 유지되고 있다"며 "현재까지 38명이 대출금을 전액 상환했다"고 강조했다.
물론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정이 어려워 장발장은행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인 만큼,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돈을 제때 갚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장발장은행은 이들을 죄인 취급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대신 상환 기간 연장 등을 통해 채무 상환을 '권유'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에 대해 오 위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사실 무담보·무이자인 만큼 기왕이면 돈을 천천히 갚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놀랍게도 많은 분이 기한보다 돈을 먼저 갚고 있다"며 "감옥에 가야 할 상황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줬다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아빠가 야단치면 엄마는 따뜻하게 보듬어줘야 집의 역할이 있는 겁니다. 설령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벼랑 끝으로 내몰기만 하면 진짜 죽고 싶을 거에요. 과도한 형벌체계가 인권을 훼손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 사회는 엄격한 부성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유럽식 '일수벌금제' 도입해 형벌 공평성 되살려야"
장발장은행의 목표는 비단 벌금을 대출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과도한 형벌 체계를 고쳐 법에 의한 피해자를 줄이는 것이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는 '장발장법'도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했다. 해당 법안은 지난 19대 국회에서 통과돼 내년 12월부터 시행된다.
다만 재산과 소득에 따라 벌금 액수를 차등화하는 '일수벌금제'는 통과하지 못했다. 장발장은행은 20대 국회에서도 일수벌금제 통과를 위한 청원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는 "같은 300만원이라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의미와 무게가 다르다"며 "형벌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공평성인데, 재벌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 똑같은 벌금을 매기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우 불리한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더 나아가서는 과도한 벌금형 체계를 바꾸는 게 목표다. 중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벌금형이 아니라 징역형을 선고받는 만큼, 단순 기초 질서 위반 건에 대해서는 형법상 벌금이 아니라 과태료로 처분하자는 취지다.
"기초질서를 위반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감옥에 가둬 신체의 자유를 빼앗는 형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소수의 문제라고요? 한 해에 범죄에 연관돼 입건되는 사람만 200만명이에요. 충청남도 인구수에 맞먹는 규모의 사람들이 형법상 범죄자로 인식되는 것은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입니다."
윤지혜기자 jie@inews24.com 사진 윤지혜·조성우기자 xconfind@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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