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송무기자] 30일 새벽 타계한 김근태 상임고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굴의 신념과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향기로운 정치인'이었다.
김 고문은 1960년대 서울대 재학시절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당시 부정선거 항의 집행을 하다 제적당해 군대에 강제 징집됐고, 1970년 복학 후에도 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됐다.
김 고문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1985년 9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에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김 고문이 '스스로 죽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상상하기 힘든 혹독한 고문이었다.
고문은 김 고문의 건강을 좀 먹었다. 2007년 파킨슨병에 걸린 김 고문은 손발이 떨리고 행동이 느려지는 등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물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만성 비염으로 인해 항상 손수건을 휴대해야 했고, 말이 어눌해지기도 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치를 함께 한 김 고문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17대 총선까지 3선 의원을 했다.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 후 김 고문은 양대 계파 수장으로 대선 후보 반열에 올랐다.
정치권에서도 그의 신념은 빛났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 재직시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가 경기부양책을 위해 국민연금을 동원하려 하자 '하늘이 두 쪽 나도 국민연금을 지키겠다'고 소신을 밝혔다.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한 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공약을 뒤집자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직언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한미 FTA 비준을 추진할 때 역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등 권력에도 쓴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 고문은 18대 총선 낙선 후 축구와 등산을 하면서 명예회복을 준비했다. 김 고문은 내년 4월 총선을 준비하면서 건강이 호전됐으나 지난달 29일 갑자기 몸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병원을 찾았고, 뇌정맥혈전증 증상에 합병증으로 결국 일어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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