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과거 롯데의 성공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과거 성공 스토리와 위기 극복 사례, 관성적인 업무 등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지난달 15일 열린 롯데그룹 '2020년 상반기 롯데 사장단 회의'에서 이 같이 외쳤던 신동빈 회장이 주력 사업인 유통 부문을 두고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급변하는 쇼핑 트렌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진한 경영성과가 이어지자 결국 강도 높은 '다운사이징(Downsizing)'을 통해 사업 효율화 작업에 나선 것이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신 회장이 롯데가 추진하는 사업과 관련해 임원들을 향해 대대적인 혁신을 주문했다. 지난해 양대 축인 유통 부문과 화학 부문 실적이 동반 하락하며 5대 그룹 중 유일하게 시가총액이 감소하자 충격을 받은 탓이다.
신 회장이 임원들에게 "유통과 화학 실적이 동반 하락한 것은 그룹 창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며 "스스로 기존 틀을 깨고 시장의 룰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돼야 한다"고 주문한 것도 위기의식의 발로다.
이어 "현재 경제 상황은 과거 우리가 극복했던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며 "수익이 안 나는 사업을 다 접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실이 된 구조조정…유통 名家 자리 '흔들'
신 회장의 이 같은 경고는 사장단 회의를 한 지 한 달여만에 행동으로 옮겨졌다. 유통 부문의 지난해 실적을 보고 받고 크게 화가 난 신 회장이 그룹 역사상 처음으로 오프라인 점포 중 30% 가까이를 정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실제로 롯데쇼핑은 지난해 전반적인 국내 소비 경기 악화와 온·오프라인 경쟁 심화 여파로 영업익이 4천279억 원으로 28.3% 줄었다. 지난해 매출은 17조6천328억 원으로, 전년 대비 1.1% 증가에 그쳤다.
당기순손실은 8천536억 원으로, 적자폭은 전년보다 2배 이상 확대됐다. 이는 할인점과 슈퍼 부진 영향이 가장 컸다. 할인점은 지난해 영업손실 248억 원으로 적자 전환했으며, 슈퍼는 영업손실 1천38억 원을 기록하며 실적에 타격을 줬다.
이에 신 회장은 올해 운영 전략의 핵심으로 '비효율 점포 정리'를 꼽았다. 롯데쇼핑 지휘봉을 잡은 강희태 유통BU장(부회장)에게 '생존'을 위한 사업 정리에 나서줄 것을 주문한 것이다.
롯데 익명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유통 사업에 큰 실망감을 느낀 신 회장이 유통 핵심 수장들을 대거 교체한 것만 봐도 얼마나 화가 났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며 "임원 회의에서도 롯데가 방만했던 경영에 대한 반성과 함께 조직을 슬림화 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강 부회장은 롯데쇼핑 내 백화점, 마트, 슈퍼, 롭스 등 총 700여 개 점포 중 약 30%에 달하는 200여 개 비효율 점포를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자산을 효율적으로 경량화하고 영업손실 규모를 축소, 재무건전성과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
강 부회장은 "임차료 대비 에비타(EBITDA, 상각 전 영업이익)가 부족한 경우 업태에 관계없이 (구조조정을) 할 계획"이라며 "부실 점포 중 80% 이상이 임차 점포"라고 말했다.
또 롯데쇼핑은 '유통회사'에서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서비스 회사'로 거듭나겠다는 미래 사업 청사진도 제시했다. 총 100만 평의 오프라인 공간을 리셋(Reset)하고 업태의 경계를 넘나드는 매장 개편으로 사업부 간 시너지를 창출할 계획이다.
이의 일환으로 경쟁력이 낮은 중소형 백화점의 식품 매장은 신선식품 경쟁력을 갖춘 슈퍼로 대체한다. 마트의 패션 존(Fashion Zone)은 다양한 브랜드에 대한 바잉 파워를 갖고 있는 백화점 패션 바이어가 기획을 진행하는 등 기존 매장 운영 개념에서 벗어나 융합의 공간을 구현할 예정이다.
또 롯데쇼핑은 3천900만 고객 데이터를 활용해 모든 고객 상품 행동 정보를 통합, 분석하고 오프라인과 이커머스의 강점을 결합함으로써 고객 개개인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더불어 다음달쯤에는 '롯데온' 서비스를 론칭해 테스트 운영할 예정으로, 이를 통해 2023년까지 온라인 취급액을 20조 원까지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다.
강 부회장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 현재 롯데쇼핑의 최우선 과제"라며 "고객, 직원, 주주들의 공감을 얻는 좋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직 슬림화보다 기업 문화 개선이 우선돼야"
신 회장의 이 같은 결단을 두고 유통업계는 충격을 받았다. 반백년 동안 유통업계 선두 자리를 견고하게 지키던 롯데가 처음으로 구조조정 카드까지 꺼내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롯데를 시작으로 유통업계 전반에 구조조정 바람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하며 긴장하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오프라인 매장은 더 이상 쇼핑의 공간이 아닌 체험 공간으로 변모한 지 오래됐다"며 "쇼핑 트렌드 중심 축이 이커머스로 옮겨진 상황에서 오프라인 점포를 필요 이상으로 보유하는 것은 사업 구조상 맞지 않다고 판단하는 유통업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신 회장은 작년 말 정기 임원 인사에서도 유통 BU장과 코리아세븐 대표를 새로운 인물로 교체하고, 각각 대표 체제이던 백화점·마트·슈퍼·e커머스·롭스 사업부문의 대표이사 자리를 없애며 구조조정의 신호탄을 날렸다.
다만 작년 말 정기 임원 인사가 급변하는 쇼핑 트렌드 환경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방만한 경영을 이어왔던 경영진들을 향한 질책이었다면, 이번에는 위기 의식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직접 행동으로 나선 것이 달라진 부분이다.
롯데쇼핑 관계자는 "지난 해 12월 단행한 조직 개편을 통해 기존 '사업부제'를 1인 CEO 체제 하의 통합 법인(HQ) 구조로 전환했다"며 "과거에는 법인 내 각 사업부가 개별 대표 체제로 운영되면서 독립적 의사결정을 하다 보니 회사의 자원을 법인 전체의 성과를 위해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올해부터는 새롭게 신설한 HQ가 통합적 의사결정을 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것"이라며 "각 사업부는 '상품 개발 및 영업 활동에 집중하는 형태'로 운영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같은 롯데의 움직임을 두고 일각에서는 구조조정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업 규모를 줄이고 조직만 바뀐다고 해서 방만하게 운영됐던 롯데의 대기업 문화가 쉽사리 고쳐지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한 때 롯데가 온라인 사업을 키우기 위해 티몬을 인수한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도 '결국 티몬이 롯데화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나왔다"며 "SSG닷컴을 키우고, 명품 중심으로 백화점 사업 강화에 나섰던 신세계보다도 쇼핑 트렌드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업계 주도권을 뺏겼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가 부추긴 오프라인 유통 위기…"일자리 감소로 이어져"
롯데쇼핑의 오프라인 유통사업들이 정부의 규제 틀 안에 갇혀 있다는 것도 성장 한계를 가져다 준 요인인 만큼, 업계에선 관련 정책들이 개선되지 않으면 롯데의 실적 개선이 당분간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내놨다.
실제로 지난 2012년 대기업 할인점은 정치권과 정부로부터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주범'으로 몰리며 출점 제한과 영업 시간 단축, 의무휴업 규제를 8년간 받고 있다. 특히 월 2회 의무휴업 규제로 대형마트 3사가 2012년부터 2019년까지 기록한 매출 손실은 약 25조9천3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슈퍼와 창고형 할인점 손실까지 합하면 규모는 30조 원을 넘는다.
업계 관계자는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의 경쟁력이 약해진 것은 유통 규제에 따른 손실액이 계속 누적된 영향이 크다"며 "오프라인 업체들이 규제에 치이는 동안 제약이 없는 이커머스 업체들은 불공정한 경쟁 관계 속에서 할인점, 슈퍼뿐만 아니라 전통시장 자리까지 침범하며 매출 규모를 키워왔다"고 밝혔다.
이어 "할인점의 경우 한 달에 두 번 주말마다 의무휴업일이 겹치면 온라인 배송까지 할 수 없도록 유통산업발전법에 정해져 있어 이커머스 업체들과 경쟁하기는 더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번 롯데의 사업 구조조정 방침은 오프라인을 향한 규제가 결국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예로, 상당한 반발이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자 8만 명 가량 되는 백화점, 대형마트 등 오프라인 유통채널 종사자들은 일자리를 잃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특히 대형마트의 경우 점포 1곳당 정규직만 200~300명, 단기 아르바이트까지 포함하면 500명 가량이 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점포 한 곳이 사라지게 되면 일자리는 그 만큼 줄어들게 된다.
이에 롯데마트 노동조합은 롯데쇼핑의 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되자 성명서를 내고 강하게 항의했다. 구조조정안 중단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면 투쟁에도 나설 것을 시사했다.
롯데마트 노조 관계자는 "200여 개나 되는 점포를 정리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대규모 인력감축이 불가피 할 것으로 보인다"며 "회사가 노조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구조조정을 진행한 것으로, 정직원들만이 아닌 협력업체와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들에게까지 닥친 재앙"이라고 강조했다.
업계 관계자는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이 위기에 빠지면서 수천~수만 개의 일자리도 함께 사라지게 됐다"며 "실적 악화로 어려움을 겪게 된 관련 업체들의 사업 구조조정이 결국 서민들의 일자리로 불똥이 튄 것"이라고 밝혔다.
장유미 기자 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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