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서상혁 기자] "서상혁 씨 휴대폰이죠? 서울남부지검 00부 000 수사관입니다. 지금 선생님 명의로 된 대포통장이 발견돼 조사를 위해 몇 가지 여쭙고자 연락드렸습니다."
머리털이 곤두섰다. 대포통장이라니 알 턱이 없다. 무서웠다. 검찰이 괜한 일로 전화를 걸지는 않을 것이다.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대포통장이요? 저 그런 거 들어보지도 못했는데요?"
자신을 수사관이라고 소개한 사람은 "보통 다들 그렇게 말씀하세요. 지금 선생님 명의로 된 대포통장이 경기도 용인시 00구 00동 000 근처에서 발견됐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전에 살았던 집 주소 근처다. 쓰레기 더미에서 찾았다고 한다. 이사 오면서 분명 모든 집을 정리했을 텐데…. 심장이 요동쳤다.
그는 "일단 발견됐으니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통장 계좌번호를 불러주시죠"라고 다그쳤다. 이미 '나 몰래 만들어진 통장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잡아먹힌 상태였다. 하라는 대로 수화기 너머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내 통장 정보를 또박또박 불러줬다. 조사 후 연락주겠다하고 그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자신을 남부지검 수사관이라고 소개한 사람의 이름을 검색했다. 이미 인터넷에선 유명 인사였다. 그 사람으로부터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글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대학에 다닐 당시 겪었던 나의 첫 번째 보이스피싱 경험이다. 다행이 내가 불러준 계좌엔 2천원 정도만 남아있어, 피해가 없었다.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논리적으로 허점이 많은 수법이었다. 그럼에도 피싱범이 시키는 대로 내가 움직이게 된 이유는 단 하나, '공포'다. 아무리 보이스피싱이 문제라고해도, 예방법에 대해 홍보가 이뤄져도 난생 경험해보지 않은 공포 앞에서 인간은 한 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이스피싱 피해 사례를 보면 마치 내 일인 것 마냥 억울하고 마음이 쓰인다.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2016년 1천924억원이었던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2017년 2천431억, 2018년 4천440억으로 집계됐다. 올 9월 기준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벌써 지난해 수치를 훌쩍 뛰어넘은 4천817억으로 나타났다.
최근 들어선 핀테크 환경을 이용해 이용자의 휴대폰에 악성 코드를 심어 원격 조종을 통해 카드론 대출을 실행시키는 수법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금융당국은 예방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수법이 새로워지고, 교묘해지는 보이스피싱 앞에서 그간의 경험칙으로 만들어진 예방책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보이스피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금융소비자가 알아서 피하는 소극적인 대응 방식으로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보이스피싱을 도저히 대응해 낼 수 없다.
가장 필요한 게 금융소비자에 대한 보상책 마련이다. 보이스 피싱 범죄는 대개 정보를 알려준 피해자의 일부 과실이 인정돼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피해자의 과실에 대해선 쟁점이 존재한다. 피싱 수법에 따라 금융기관의 보안의무가 수반돼야 하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어서다.
그나마 지난 8월 보이스피싱 등 범죄로 인한 피해 재산을 국가가 몰수하도록 한 '부패재산의 몰수 및 회복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된 건 다행스런 일이다. 향후 정부 차원에서 피해자 보상에 대한 폭넓은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
관련 산업 육성도 좋은 방안이다. 기업은행은 금융감독원, 한국정보화진흥원과 함께 '피싱스톱'을 개발했다. 통화도중 보이스피싱 사기 확률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경고, 음성, 진동으로 알려주는 서비스다.
최근 금융감독원은 발신자 정보를 알려주는 앱 '후후'의 개발사인 후후컴퍼니와 협약을 맺고 보이스피싱으로 신고된 번호를 안내해주는 서비스를 시행했다. 향후 악성 앱 탐지기능도 개발할 계획이다.
보이스피싱 예방법을 홍보하는 것 이외에도 할 수 있는 게 얼마든지 많다. 정부가 '혁신 금융'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고 싶다면, 그 이면인 '보이스피싱'을 당면 과제로 삼아야 한다. 안전하지 않은 금융은 '금융'이라 할 수 없다.
서상혁 기자 hyuk@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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