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한민족은 서쪽에서 출발, 시베리아 초원, 몽골고원을 통과하여 만주 평야를 지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서 한반도로 이동했을 것이다. 수천, 수만 년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된 민족이동은 늦게 온 민족은 서쪽의 발달 된 선진문명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일찍 정착한 후진 주민과 투쟁, 지배, 화합 과정을 거쳐서 한민족을 만들고 한민족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민족의 형성 과정에서 많은 전설과 설화는 구전으로 전해졌다. 한민족이 시원은 무엇인가? 한민족의 공통된 정신세계는 무엇인가? 궁금한 질문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한민족의 원시적 사상은 유목민에게서 전수된 텡그리신(천신)과 샤머니즘 신앙이다. 과거 텡그리신, 천신, 하느님은 같은 의미이다. 하늘의 '하느님'은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는 절대적 '초월신', 윤리와 도덕을 상징하는 '인격신' 등 복합적 의미로 우리의 정신세계 기저를 이루고 있다.
'샤머니즘'은 모든 생명체, 무생명체(하늘, 바위, 고목 등), 죽은 조상 등 모든 곳에 영혼(霙魂)이 있다는 믿음이다. 고대사회에서 '하늘, 하느님'을 비롯해서 영혼과 소통하는 역할은 샤먼(무당)이 담당한다. 유목사회 칸, 중국의 황제는 하느님의 아들, 천자(天子)로 호칭하면서 백성들에게 정치적 통치권 위임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하느님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의 특권이고, 하느님의 명(천명)을 받아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사상은 공자의 유학을 통해서 동양의 통치 이념으로 발전했다. "하늘이 노한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하늘의 명령. 하늘이 복을 내린다. 지성이면 하늘이 감동한다" 등 고대 원시신앙인 텡그리신, 천신사상과 관련이 있다.
우리 애국가 가사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도 천신 사상의 사례이다. 샤먼(무당)은 하늘. 하느님, 죽은 혼령 등 많은 영적 존재와 소통한다. 샤먼은 영적 존재와 소통 능력을 지닌 중간자로서 민중의 점성술, 복을 빌고, 질병의 치유, 미래의 예측 등 고대사회뿐 아니라 현재도 실질적 역할을 하고 있다. 시베리아와 바이칼호는 한민족 샤먼의 전설과 설화의 시원이다.
시베리아 중심부에 위치한 바이칼호는 한국 사람들에게 두 가지 이유로 익숙한 곳이다. 첫 번째 이유는 먼 옛날 한민족 발원지가 바이칼호 주변 시베리아 평원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는 민족이동 학설이다. 당시 함께 이동한 무속인 샤먼(무당)의 영적인 성지가 알혼섬 외곽의 절벽 돌산 밑에 있는 작은 동굴이라고 한다.
세계 무속인 행사가 주기적으로 열리고, 우리나라 무속신앙 연구자 등 많은 사람이 이 지역을 찾는다. 필자도 4년 전 추운 겨울철 이곳을 가 봤다. 무속인 성지는 바이칼호 내부의 섬인 '알혼섬'에 위치한 작은 돌산인데 브랴트 몽골인들이 매우 신성한 지역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시베리아, 몽골고원을 비롯한 유목민의 옛날 전통 신앙은 '텡그리 신', 한자어로 '천신(天神)'이다. 이곳은 샤먼(무당)들이 영적인 기(氣)를 받는 기가 매우 센 지역인지도 모르겠다. 샤먼(무당)은 우주와 자연의 기(氣)가 응축된 기가 센 지역을 찾는다고 한다. 나도 바이칼호의 태고적 기(氣)를 듬뿍 받고 싶다.
다른 하나는 춘원 이광수 선생님의 소설 "유정"의 배경이 바이칼호수이다. 소설 유정은 1933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당시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내가 4년 전 추운 겨울 바이칼호에 가게 된 배경도 50여 년 전 학창 시절 감명깊게 읽었던 춘원의 소설 '유정'의 배경을 보기 위함이다. 유정의 내용은 삼각관계 러브스토리이다.
남자 주인공 최석(여고 교장), 최석의 친구로 독립운동가인 죽은 친구의 딸 남정임(고아처지로 최석이 맡아 키움, 최석이 교장으로 있는 여고 제자), 최석의 부인 사이에 발생하는 사랑과 질투와 오해로 인해 발생하는 연애소설이다.
1933년 당시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매우 생소한 시베리아 바이칼호로 주인공 최석이 도피하고, 바이칼호에서 사망하는 소설이다. 50대 이상 연령층은 소설 또는 영화로 "유정"을 기억하고 있다. 춘원 선생이 왜 바이칼호를 소설의 엔딩배경으로 삼았는지 내용을 소개한다. 춘원 선생은 1892년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최고의 인기 소설가이다. 춘원 선생이 1914년 미국 LA의 '신한일보' 주필로 내정되어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미국으로 가는 중간에 바이칼호를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춘원 선생은 미국 LA로 가기 위해서 서울에서 출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 탑승, 러시아 모스크바를 거쳐, 배편으로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 미대륙을 기차로 횡단하여 LA로 가는 여정의 계획을 세웠다.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코스이지만, 1914년은 이렇게 미국으로 갔던 것으로 추측이 든다.
미국으로 가는 도중,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여 춘원은 시베리아의 '치타'(자동차 고장 정비를 위해 들렸던 도시)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고 한다. 치타에 머물고 있을 때 아마도 바이칼호를 관광했을 것이고, 바이칼호에 대한 강한 인상으로 19년 후 연재 소설의 배경을 바이칼호로 설정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춘원 선생은 시베리아 치타에 머물다가 여비 부족으로 귀국했다.
나이 든 사람은 기억하는 고인이 된 여배우 '남정임' 씨는 1966년 개봉된 영화 '유정'이 데뷔작이다. 남정임 씨는 영화 '유정'으로 은막의 스타가 되었고, 예명을 '남정임'으로 정한 것도 소설 유정의 여주인공 남정임 이름을 따온 것이다.
4년 전 겨울철인 2월, 얼음으로 덮인 바이칼호와 알혼섬 주변을 얼음 위에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얼음두께가 1미터 이상 얼면 차량 통행을 허용한다고 했다. 당시 아침 기온 영하 30도, 40도, 해가 뜨는 낮 기온은 영하 20도 추위인데, 겨울옷을 많이 껴입고 여행했던 기억이 새롭다.
'알혼섬' 민박집에서 며칠 숙박하면서 북반구 겨울 하늘의 총총한 별을 보았던 감동이 진하게 남아있다. 어제저녁 바이칼호에서 여름밤 별구경을 하자고 미세스 송과 약속했는데 저녁 반주로 먹은 보드카 숙취로 여름밤 별을 못 본 게 아쉬움이다.
아침 6시 일어나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바이칼호 백사장을 여유롭게 산책한다. 바이칼호의 공기는 달고 가볍다. 산소가 많은 태고적 청정지역이기 때문이다. 호숫가에는 모래 백사장도 펼쳐져 있고, 맑은 물속에 검은 몽돌이 많이 있다.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러시아인도 있는데 여름철 수영하러 놀러 온 것 같다.
몽골계 민박집 여주인이 아침 식사에 본인이 키우는 젖소에서 금방 짜왔다는 따듯한 생우유를 가져와서 맛있게 먹었다. 러시아인 남편과 함께 민박집을 운영하는데 팔려고 내놨다고 한다. 60세 나이인데 젊어 보인다고 말하니 매우 좋아한다. 아침 식사는 서울에서 가져온 햇반과 김치, 고추장으로 해결하였다.
오늘은 절기상 7월 15일 서울 기준 초복 날이다. 서울은 무더위로 고생하는데 이곳은 가을 날씨처럼 선선해서 저녁은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 낮 기온은 피서하기에 매우 쾌적하다. 처음 만나서 서먹서먹하던 일행들 성격도 알게 되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불규칙적 식사, 지방질 많은 음식, 차 안에 장시간 앉아 있음 등으로 소화불량, 설사로 여러 명이 고생하고 있다.
K교수는 유명한 교회의 퇴직한 목사인데, 이슬람국가와 사회주의 국가를 여행하는 점을 고려하여 K 교수로 호칭하기로 했다. 가장 연장자로 일행의 화합에 기여하고 있다. 평소 3시간 이상 트래킹을 매일 해서 아주 건강하시다. K회장은 중견기업 창업자인데 운동 메니아이다. 서해, 남해, 동해의 해안선 1800킬로를 40여 일에 걸쳐 걸었고, 백두대간도 종주한 에너지 넘치는 분이다.
"혼자 걷는다" 프랑스 베르베르 올리비에 책을 감동깊게 읽었다고 한다. 꿈이 시안에서 이스탄불까지 도보로 걸어서 통과하는 것이다. O대표은 자수성가한 이천의 중소기업인으로 해외 마라톤 출전 10여 회 포함 마라톤 출전이 수십 회인 강한 체력자이다. 사진 찍는 게 취미이다. 음식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기업 간부 직원인 L 실장이 산악자전거 등 운동 메니아이다. 10년 전 시베리아, 만주지역을 한 달간 직접 자동차를 운전해서 달린 자동차 여행 경력자이다.
L실장은 8월 말까지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 모든 휴가를 풀로 사용해서 참가했는데 무단결근하면 징계 대상이라고 한다. L실장의 귀국 일정에 맞추어 예약된 이스탄불에서 귀국하는 8월 말 비행기 스케쥴이 여행 일정을 독촉한다.
미세스 송은 허리가 안 좋아서 허리보호 복대를 착용하고 여행에 잘 적응하고 있다. 딱딱한 남성들 사이에서 갈등 해소, 화목 분위기 조성, 배탈 난 응급환자 간호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나와 미세스 송의 체력이 일행 중에서 가장 약한 편이다. 구글 맵, 구글 GPS의 위대함을 체험한다. 구글 서비스가 없다면 초행길 시베리아 횡단은 꿈도 꾸기 어렵다.
미국 일론 머스크 '스타링크'가 왜 세계적으로 비즈니스가 잘 되는지 알게 되었다. 인구밀도가 희박한 산림, 사막, 고원 등 오지를 통신망으로 모두 연결하려면 경제성이 떨어져서 투자가 어렵다. 이 빈자리를 스타링크가 채워준다. 스타링크 가입비용을 검색해 보니 현재 월 99달러, 단말기 별도 설치비용 등이다. 오지지역의 통신을 위해 수백대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띄우는 일론 머스크의 기업가 정신에 위대함을 느낀다.
디지털 문명의 해악인 '휴대폰 중독' 현상은 시베리아 오지에서도 매일 목격하고 있다. 디지털 세계화와 글로벌화가 대추세임을 시베리아 오지에서 다시금 체험한다. 우리는 내일부터 몽골고원과 고비사막을 통해 중국의 내몽골 국경으로 가야 한다. 앞으로 순탄한 여행의 흐름을 타면서, 남은 구간을 안전하게 완주하고 싶다. 바이칼호의 텡그리신이여 도와주소서!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서울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교 회계세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세청, 재무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제24대 관세청장,삼정kpmg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심산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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