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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I의 과학향기]쌀의 자급을 가능하게 한 육종학자, 허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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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원짜리 동전 뒷면에 새겨져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벼, 더 정확히 말하면 '통일벼'다.

1970년대 한국은 통일벼의 등장으로 고질적인 식량부족 문제를 떨쳐내고 식량자급 국가로 탈바꿈했다. 이 벼는 기존의 벼보다 많은 쌀을 쏟아내는 다수확 품종으로 일명 '기적의 볍씨'라 불렸고, 박정희 시대 대표적인 성과물로 한국의 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런 통일벼를 개발한 이는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육종학자 허문회(許文會, 1927~2010)다.

허문회는 서울대학교 농학과 교수(1960~1990)로 재직했고, 통일벼 개발 이후 한국육종학회장, 한국작물학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농학계를 이끌어 온 대표적인 과학자다.

그는 1964년 필리핀에 있는 세계적인 연구기관인 국제미작연구소(IRRI)에 초청연구원으로 파견되면서 연구자로서 전환기를 맞이했다. 바로 통일벼의 모종이 되는 'IR667'을 그곳에서 개발해낸 것이다.

허문회가 처음 IRRI에 갔을 때 목적은 품종개량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면서 인디카종 가운데 한국에 도입할 수 있는 벼를 골라오는 것이었다.

인디카종은 볍씨가 많은 다수확 품종으로 주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열대지방에서 재배되는 벼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에서 재배되는 온대형 자포니카종과는 유전적 형질이 매우 달라 자연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키울 수 없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는 품종개량을 통해 인디카종도 한국에서 재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허문회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을 신품종 개발이 아닌 인디카종의 도입을 위해 파견했다.

그렇다면 왜 허문회는 느닷없이 신품종을 개발했을까?

IRRI에 도착한 후 허문회는 그곳에 있던 온갖 인디카종을 면밀히 살펴 연구한 끝에 인디카종은 절대 한국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면서 인디카종을 대신할 다른 돌파구로서 인디카종과 자포니카종의 '원연교잡(서로 특성이 다른 것끼리의 교배)'을 통한 신품종 개발을 택한 것이다.

이 교잡은 종간 거리가 먼 종끼리 교잡하는 방법으로 교배기술도 까다로울 뿐 아니라, 교잡을 해도 불임현상을 보이므로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허문회는 인디카종만으로는 한국에서 잘 자라는 품종을 만들 수 없다는 확신에서 과감하게 원연교잡을 실시했다. 교잡재료는 생산성이 입증된 인디카종과 한국의 자포니카종으로 한정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원연교잡은 '잡종불임'이라는 난관에 봉착했다.

그래도 허문회는 계속 교배조합을 바꾸어 연구를 지속했다. 인디카종과 자포니카종의 교배로 600여개의 조합 잡종을 만들었고, 그것들 중 21개를 선별해 수대에 걸쳐 자가교배를 시키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잡종불임이 수대 교잡을 통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는 인디카종과 자포니카종 간의 원연교잡이 완전한 불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아주 새로운 결과였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허문회는 '삼원교잡'을 통해 불임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삼원교잡으로 원연교잡 벼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 허문회는 한국에 맞는 다수확 벼 개발에 착수했다. 가능성 있는 교배조합을 생각한 끝에 내랭성(耐冷性, 냉온에 견디는 성질)이 좋은 인디카종 TN1과 한국의 자포니카종을 원연교잡하고, 생산성이 뛰어난 인디카교잡종 IR8을 매개품종으로 교잡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의 벼만 적절히 선발하면 금방이라도 다수확 벼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 품종과 섞이면 출하시기가 너무 늦춰져 인디카종의 특성이 발현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다 우연히 방문한 일본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다. 일본의 벼 가운데 출하시기가 빠른 유카리라는 자포니카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허문회는 곧바로 TN1과 유카리, 그리고 IR8을 가지고 삼원교잡을 실시했다. 그 결과 다수확 품종 'IR667'이 탄생한 것이다.

허문회의 IR667 개발 소식은 곧바로 농촌진흥청에 알려졌고, 이는 박정희의 귀까지 들어가게 됐다.

사실 당시 한국은 정보부 요원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인디카종의 보급에 크게 실패한 직후였던 터라 박정희로서는 이를 만회해야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들려온 IR667의 개발 소식은 그에게는 더없는 기회였고, 박정희는 곧바로 시험재배를 지시했다. 그리고 3년간의 시험재배 끝에 1969년 IR667은 한국에서 잘 자라는 다수확벼로 확인돼 '통일벼'라는 이름을 달고 전국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급 첫 해 통일벼는 자연재해와 농가의 재배기술 부족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통일벼의 미질이 나빠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고, 줄기가 짧아 볏집의 유용성도 떨어진다는 이유로 보급을 주저하는 농민도 많았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전 부처 장관을 소집한 자리에서 '미질 보다 먹고 사는 게 먼저'라며 강력하게 '통일벼' 보급을 주장했고, 허문회는 농촌진흥청의 연구원들과 통일벼의 문제들을 개선하는데 주력하며 그것의 보급을 도왔다. 덕분에 한국은 1975년 통일벼가 보급된 지 5년 만에 국가가 목표로 하던 식량자급에 성공하며 '한국의 녹색혁명'을 일구어 냈다.

결론적으로 통일벼는 한국의 쌀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한 벼이기 이전에 허문회의 육종기술로 만들어낸 과학기술성과였다. 그것은 IR8만큼 생산량이 우수한 것도, 자포니카종 벼들처럼 맛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통일벼는 어렵다던 원연교잡을 시도하면서까지 한국에 맞는 벼를 만들고자한 허문회의 연구열정으로 나온 성과였다. 그랬기에 통일벼는 당시 한국에서만은 어떤 벼보다 뛰어난 다수확 품종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고,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한 자격을 지니게 된 것은 아닐까.

글 : 선유정 과학칼럼니스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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