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명한 지성사가인 리차드 호프슈태더는 그의 주저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에서 미국 문화에 있어서 반지성주의의 주요인 중 하나로 기독교의 복음주의를 들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유럽의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교회 권위와 제도를 피해 이주한 신교도들에 의해 시작된 나라죠. 대개 유럽지성은 제도화된 교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고 그들은 카톨릭의 보편성과 유일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로 인한 반작용으로 신교도들은 지성보다는 영성 혹은 감성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죠. 특히나 미국으로 피난온 신교도 중에는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이 많았고 이는 미국 청교도주의의 중요한 일부가 되지요.
로버트 제맥키스의 [포레스트 검프] 역시 그런 미국문화의 한 경향을 충실히, 그리고 아주 대중적인 방법으로 대변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우선 첫 장면부터 기독교적인 상징으로 시작합니다. 비둘기 깃털이 하늘에서 날려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흙탕이 된 포레스트의 운동화 위로 떨어지지요. 비둘기는 기독교에서 성령의 상징이죠.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 때 하늘이 갈라지더니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예수의 머리 위에 앉는 것을 봅니다. 이런 비둘기는 기독교 문화에서 단순한 마음과 솔직함의 상징으로 뱀의 상징과 대척점에 놓이지요.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검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행운에 휩싸이고, 고난 후에도 항시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신의 보살핌 속에 있는 것이지요. 그는 어머니의 독실한 생활방식을 아무 의문도 갖지 않고 충실히 따르며 주일마다 교회에 가고 자신의 행위와 인생, 그리고 사회에 대한 주인의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런 면모는 "주님의 충실한 양"으로서의 조건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사고방식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뜻을 고스란히 실현시키는 깨끗한 도구로 여기고자 하는 기독교적 정신이 숨어있습니다. 인간의 자만과 만용은 금기시되고 모든 것은 신이 정해놓은 바대로 이뤄질 뿐이라는 예정조화설도 있고요.
자 그럼 그 주위에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우선 부모 잘못만나 고생하고 뭔가 이룰려고 시도하다 실패한 나머지 저항문화에 가담하기도 하고 마약과 방탕에 빠지기고 하는 여자친구 제니입니다. 그리고 군대에서의 그의 상관(아마 중위였을 것)으로 검프가 구해줬지만 두 다리를 잃은 남자가 있지요. 제니는 에이즈로 죽고 중위는 큰 돈을 벌죠. 제니는 검프가 끊임없이 걱정하는 '돌아온 탕아prodigal son'죠. 성경에 나오는 탕아의 비유(탕아는 자기 몫의 상속분을 미리 받아내서 방탕한 생활로 탕진해 버린 후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는 죽었다 살아났기 때문이다)에 의하면 이는 하느님을 받아들인 회개인 죄인을 의미합니다. 검프는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써 제니가 언제든 돌아오기를 기대하지만 결국 이를 거부한 제니는 에이즈에 걸려 죽고 맙니다. 이런 비유를 통해 전후 미국문화에서 좌파에 섰던 경향들은 모두 탕아적인 어떤 것으로 도매급으로 치부되지요.
중위의 경우는 욥의 고난과 신앙을 연상시킵니다. 성경에 따르면 용은 경건하고도 의로운 사람으로 하느님이 그의 충실성을 시험에 들게 하여 온갖 거친 고난을 다 당하지만 그래도 결국 그의 신앙을 지키는 자로 나오죠. 욥은 암흑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죄 없는 사람의 이미지로 불행의 의미에 대한 섣부른 인간적인 판단이 잘못임을 보여주는 예를 쓰입니다. 중위는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함에 두려움은 없다는 점에서 어떤 경건하고 의로운 충실성을 상징하지만 정작 그는 명예는 커녕 두 다리를 잃고 바보에게 들려업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습니다. 이로인해 그는 사회와 신에 대해 극도의 저항감에 휩싸입니다. 심지어는 검프와 새우잡이를 떠나서 태풍을 만나자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감히 신과 맞짱을 뜨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검프에게 돌아왔으니 구원을 얻게 되지요. 중위에게 돈다발을 안겨줍니다. 이런 비유 역시 좌파 경향의 사람들에게는 거슬리는 부분입니다. '고난속의 믿음'이란 모티브를 하필 우파적 세계관(조국을 위한 장렬한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으니까요. 까놓고 말해서 예수님이 언제 네 조국을 위해 타민족을 죽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게다가 정의조차 모호한 정략적 냄새 풀풀나는 베트남전인데 말이지요.
포레스트 검프의 성격은 비어있다고 해야 하겠죠. 비어있음은 멍청하다는 뜻이면서 개신교적 관점에서는 신의 소용에 알맞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카톨릭의 경우 신의 말씀은 교회와 교회의 공인을 받은 지성인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고 보지만 거꾸로 개신교에서는 신의 말씀은 덜 배워서 순수한 사람에게 더 가깝습니다. 그게 바로 포레스스 검프죠. 미국 전후의 사회가 이뤄온 몇가지 사회-문화적 진보도 포레스트 검프를 매개로 이뤄집니다. 그는 신의 의지의 전령사로써 워터 게이트 사건을 밝혀내고, 중국과 핑퐁외교를 펼치는 등 굵직한 사건들의 숨겨진 원인이 됩니다. 우스개로 넣은 장면인 듯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보이는 구석이 분명 있을 겁니다. 이미 미국사회는 급속도로 탈종교화되어가는 사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문화적 기초를 이룬 사고의 패러다임은 건재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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