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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남상용 창민테크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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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코너입니다.벤처기업가들의 창업기는 그 수많은 기업 숫자만큼이나 복잡다단한 사연과 역정으로 가득한 것같습니다.

한 평생 똑같은 바둑을 둘수 없듯 벤처기업가의 험난한 창업스토리 역시 동일한 '복제판'은 없는 듯합니다.마흔 여섯번째 소개된 인프론테크놀로지 김유진 사장의 창업스토리 역시 흔치 않은 성장사를 보여준 케이스 입니다.

김 사장이 추천한 마흔 일곱번째 주인공 역시 벤처창업후 성공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고단한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우라 할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창민테크의 남상용 사장입니다.김 사장은 추천하면서 "참 어렵게 창업했고,정말 특별하게 성공한 CEO"라고 말했습니다.특별하게 성공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창민테크 남상용 사장의 특별한 벤처창업스토리를 소개합니다.


"제발 저희 직원들에게 접대하지 마세요.설이나 추석때 선물도 보내지 마시구요" 올해초,창민테크 남상용(46) 사장은 창민테크에 부품 및 자재를 납품하는 하도급업체 30개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통사정을 했다.

"저희 직원들에겐 이미 법인카드를 지급했어요.식사와 술 등 모든 비용은 창민테크가 부담할 것입니다.선물하고 접대하다 보면 그게 다 원가에 들어가고 제품의 퀄리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됩니다.창민테크가 세계적 기업이 될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세요"

남 사장은 그의 독특한 인생역정만큼이나 창업스토리 역시 남다르다.분당 아파트단지 끝자락 테크노파크내에 위치해 있는 공장겸 사무실에서 만났다.

참 고생 많이 했을것 같은 느낌이다.실제 남 사장은 산전수전 다겪은 벤처 CEO다.작은 키에 숱이 그리 많지 않은 헤어스타일은 은행가나 대학교수를 연상케할 만큼 정적인 분위기다.

외모와는 달리 남 사장은 매우 역동적인 모험기업가다.14년전인 88년에 단돈 200만원으로 창업,온갖 고생끝에 지난해에 코스닥등록기업 CEO 대열에 합류했다.

창민테크는 물,기름,가스 등 액체나 기체의 양과 속도,깊이를 자동으로 파악해주는 정밀계측기기 전문개발업체다.즉 유량계와 유속계,수위계 등이 주력 생산품.지난해 168억원,올해는 277억원의 매출을 바라보고 있다.2000년 7월 코스닥에 등록했다.

질곡의 세월

대학 1학년이던 76년 11월,부친이 갑작스레 작고하면서 남상용의 인생은 졸지에 '가장(家長)'으로 살아가야 했다.5남매의 장남,단칸방 생활.모친은 화장품회사 외판원으로 일했지만 살림은 늘 빠듯했다.

그가 창업을 꿈꾸기 시작한 것도 젊은 시절의 찌든 가난때문이었다.대학졸업후 외환은행에 입사했지만 초,중,고등학교에 줄줄이 다니는 동생들 학비 대기도 벅찼다.돈없는 집 장남(長男)하기란 참 힘든 일이었다고 술회한다.

"가계수표를 할인,등록금을 마련해주고 나면 정확히 6개월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거예요"은행원 봉급으로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결코 끊을수 없음을 절감했다.

83년 8월 삼환기업으로 옮겼다.이유는 중동근무 자원시 월급을 많이 주기 때문.중동특수가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지만 남 사장은 꼬박 28개월간 사우디 제다지사에서 근무했다.

월급은 국내 기업의 2.5배 수준.하지만 현지에서 돈쓸 일이 거의 없어 대부분 저축했기 때문에 국내에서 받던 월급보다 몇 배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고 기억한다."한달에 2만원 정도 썼죠"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술,담배도 끊었다.28개월간 근무하면서 휴가 2번을 모두 반납한 그를 두고 상사들은 "참 독한 놈"이라고 놀리기도 했다.'창살없는 지옥'생활을 청산하고 86년초 귀국했다.단칸방에서 방 두칸짜리로 이사하고,동생들 공부도 거의 끝낼수 있었다.

남상용, 그는 누구인가
46세.경남 밀양생.경복고,서울대 경제학과 76학번출신.마당발로 불릴만큼 각계각층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있다.고지식할만큼 원칙을 중시하는 덕장형 스타일. 뛰어난 기억력과 추진력이 남다르다는 게 주의 평. 다변이지만 흡인력있는 화술이 강점
취미바둑(3급)
주량술은 거의 안함(할 때는 많이 먹음) 담배는 하루 세갑에서 최근 잠시 금연중
운동 골프(최근 시작해 10회정도 라운딩함.골프시작후 최근 몸무게가 10㎏빠짐)
존경하는 CEO정문술 전미래산업 회장(깨끗하게 떠나고,사회에 기부하는 자세를 존경한다)
친한 IT맨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변대규 휴맥스 사장,장흥순 터보테크 사장
10년후 모습유량계시장 세계 1위 업체 대표이사를 맡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제 2,3의 아이템을 계속 개발하고 있을 것이다. 창민테크는 코스닥 TOP5에 들어있을 것이다.

창민테크 2001년도 사업계획 자료

독특한 창업,134명의 주주

귀국후 곧바로 퇴사,현대종합상사에 입사했다.창업에 필요한 무역업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2년뒤인 88년 1월 창업했다.집안살림과 동생학비 등을 쓰고 남은 200만원이 사업밑천의 전부였다.

창민(昌民)무역을 설립했다.창민은 종업원을 두루 번창하게 한다는 의미.수중에 200만원밖에 없었지만 그는 1억원의 자본금을 모았다.놀라운 것은 자본금 1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무려 134명의 주주를 동원한 것.

고등학교,대학동창,친인척 등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여 적게는 50만원에서 많게는 200만원까지 투자를 유치,134명의 엔젤투자자를 모아 자본금 1억원짜리 회사를 만들었다.이런 독특한 '십시일반'자본금 만들기가 가능했던 것은 그의 파워풀한 네트워크 덕분.

남 사장은 경복고,서울대 경제학과 76학번 출신이다.실제 134명의 주주중 경복고 동창이 65%쯤 됐다.4년간 정신없이 사업에 매달렸다.닥치는 대로 했다.하지만 사업은 그리 녹녹한 게 아니었다.돈 역시 쉽게 벌리지 않았다.

"아마 여자와 마약 빼고 안해본 게 없을 겁니다.돈된다는 건 다 해봤죠.하지만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죠.기술적 배경이 없다보니 전공이라할만한 아이템이 없었거든요"88년말,자금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상용의 처절한 창업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직접 '개발'을 결심한다."전자부품을 중국에 대량으로 수출했다가 클레임을 받은 뒤 제조업진출을 결심했죠.아이템없이는 사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더라구요"

92년 모대학 교수와 반도체장비인 '표면저항측정기'를 공동 개발하기 시작했다.하지만 혹톡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장비개발은 무려 3년이 걸렸다.결국 95년 삼성전자에 5000만원어치를 납품하면서 개발을 완료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끝없이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아마 개발에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하지만 시작한 이상 끝까지 갈수 밖에 없었죠"

물론 3년여간 들어간 돈은 모두 주위에서 빌렸다.매출은 거의 없고,끝없이 돈을 빌려야 했던 남 사장은 93년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붉은 별아래 청춘을 묻고'

"아버지처럼 모시고 개발에 전념할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93년말 남 사장은 KIST내 한러기술센터에 근무하고 있는 재러과학자 장학수(70) 박사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장 박사의 '붉은 별아래 청춘을 묻고'란 자서전을 읽고 감명받았습니다.이런 세계적 석학을 모시고 개발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당시 2년 근무조건으로 국내에 머물고 있던 장 박사는 경복중학교 23년 후배인 남 사장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 들였다.남 사장은 이를 계기로 93년 회사이름을 창민무역에서 창민테크로 바꾸고 본격적인 제품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장 박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장 박사는 물(水)박사다.

중학교 2학년때인 16세였던 1948년 38선을 넘어 월북한 장 박사는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모스크바 전기통신대학 무선공학부를 졸업,출세가도를 달리던 북한의 과학자출신이다.

하지만 붉은 체제에 항거,61년 두만강을 헤엄쳐 구사일생으로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다.이후 하르코프공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그는 러시아 토지개량수리자동화연구소,레닌그라드 수문과학연구소 등에서 20여년간 수리관리와 자동화기술을 연구했다.

그는 물이나 기름,가스 등 유량의 양과 속도 등을 가름하는 분야에서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실제 유량(流量)과 관련한 치수(治水)기술은 러시아가 세계 최고수준.

90년 42년만에 서울땅을 밟은 그는 한러과학협력차원에서 한러기술센터의 러시아측 자문관으로 일하고 있었다."이런 세계적 석학의 기술을 들여와야 국내 산업계가 경쟁력을 가질수 있습니다" 정보기관 직원들을 수없이 설득,장학수 박사의 영입에 성공한다.

돈,돈,돈…낙찰계를 아시나요

"장모님,대지담보가 해제됐습니다.등기부등본에 형광펜으로 줄쳐진 것 보이시죠?"99년말,남 사장은 5년간 5억원 대출을 위해 땅 담보를 해준 친구의 장모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감사의 뜻을 전했다.

남 사장은 이 무렵 이외에도 수십군데를 찾아다니며 담보나 보증대출을 서준데 대해 감사의 표시를 했다.작게는 몇 천만원에서 많게는 10억원 가까이 담보,대출보증을 서준 지인들에게 대한 답례였다.

그의 가슴아픈 창업스토리는 장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이 결정적 계기가 된다.세계적인 제품을 개발할수 있다며 호언장담하는 장 박사의 자신감은 엔지니어로서의 순수한 꿈이었다.

이를테면 세계 최고수준의 유량계를 만들수 있고,세계 시장을 평정할수 있다는 전형적인 엔지니어의 논리였다. 놀랍게도 장 박사의 보랏빛 청사진을 남 사장이 액면 그대로 믿고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이다.

창민테크의 고된 역사와 남 사장 개인의 가슴저미는 사연은 이때부터 절절히 시작된다. 93년말 장 박사와 손을 잡은 남 사장은 유량계 개발에 착수했다.60이 넘은 나이의 장 박사는 3년내 개발완료를 장담했다.

남 사장은 창업후 12년동안은 사실상 CEO라기보다는 재무담당 상무였다고 술회한다.스스로 '재무담당'이라 표현한 기막힌 스토리의 하이라이트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개발에 3년 걸려.한국시장은 없어. 때문에 특허를 출원하고 세계 시장으로 나가면 승산이 있어…" 장 박사의 제안에 남 사장은 3년만 고생하자고 마음먹었다.

당시만해도 창투사조차 투자개념이 없었던 시절.온갖 방법을 동원해 3년간 끌어들인 개발비는 무려 50억원. 눈물겨운 세월의 시작이었다.담보및 보증대출,사채만이 유일한 자금줄이었다.남 사장이 이 기간동안 돈을 끌어다쓰기 위해 동원한 보증인은 무려 80 여명.

이중 10명은 단골로,1명이 통상 10번까지 보증을 섰다."연인원으로 따지면 200명정도가 보증을 섰더라구요" 사채와 담보대출 50억원을 관리하기 위해 그는 매일 신경을 곤두세울수 밖에 없었다.

수십건의 대출금 및 사채 이자를 건건별로 매일 매일 체크,갚아야 했기 때문이다.그의 머리속은 늘 '오늘은 무슨 무슨 이자 갚아야할 날'이 빈틈없이 기억돼 있었다.

50억원쯤 되면 갚을 이자와 날짜,금액 등은 빠뜨리지 않고 챙기는 것만해도 만만찮은 일.그가 하루 하루 어떻게 살았을 지를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80명의 보증인으로도 더 이상 대출이 어려울 때면 낙찰계를 이용하기도 했다.그는 낙찰계를 관리하는 낙찰계관리자(일명 오야)생활을 10년 넘게 했다.그렇게 50억원을 쏟아부은 3년간의 개발기간이 끝난 96년말,남 사장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개발은 끝났지만,상품화를 위해서는 개발에 버금가는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제품개발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 지를 처절하게 느꼈다.

사실 그는 3년간의 개발이 마무리되자 마자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갈줄 알았다."개발과 상품화는 완전 별개더라구요.상품화와 마케팅에 개발만큼의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거죠. 정말 산넘어 산이었죠"

그는 자신이 참으로 순진했다고 토로한다."상품을 팔때까지의 기간은 통상적인 개발기간에 곱하기 2~3을 해야하며,자금역시 개발비의 2~3배를 투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거죠"

또다시 돈을 끌어들여야 했다.본격적으로 사채를 쓸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2부 이자를 내야하는 사채는 금새 원금의 몇 곱절 이자를 만들어내며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채는 금새 50억원에 달했다."복리이자가 얼마나 무서운 지는 당해본 사람만이 압니다.몇 천만원으로 시작한 사채가 1억원 넘는 것은 금방입니다"

97년 개발을 끝낸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현재의 분당 아파트공장으로 입주했다. 결국 3년이면 끝날줄 알았던 유량계개발은 결국 6년만인 98년말께 상품화까지 마무리지을수 있었다.

"누가 6년이나 걸릴줄 알았겠습니까? 처음부터 6년정도 걸리고 100억원의 개발비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죽어도 하지 않았겠죠.하지만 어쩔수 없이 계속 밀어부칠수 밖에 없었습니다.하다보니 돌아갈 길이 없는 그런 상태였죠"

회사원,의사,한의사,대학교수,공무원,변호사,사업가 등 그가 6년간 100억원의 빚을 끌어다쓰기 위해 동원한 담보제공자및 보증인들은 빌린돈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했다.

그가 14년간 134명의 주주를 끌어모으고 연 200명의 보증인을 동원하며 100억원대의 대출과 사채를 끌어들일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신뢰성'덕분이다.약속만큼은 목숨처럼 지켰다.이자갚는 일,직원 월급 등은 단 하루도 늦은 적이 없다.

남 사장의 창업기가 진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이런 엄청난 차입과 이를위해 동원한 보증인규모 때문이다.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6년간 끝까지 밀어부친 그의 집념 역시 성공의 밑거름이었다.

남상용은 100억원에 이르는 빚더미속에서 어느 것하나 삐끗하면 곧바로 부도로 공중분해될 살얼음판 같은 세월을 14년간이나 버텨왔다.

대박의 꿈

다행히 장 박사가 개발한 유량계는 미국 일본 등 해외에 총 34건의 특허를 획득했고,23건을 추가 출원해놓을 만큼 독창적인 것이었다.

특히 장 박사는 무선공학박사 학위도 있어 이를테면 토목과 전자를 합친 분야에서 독보적인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창민테크의 유량계 등 초정밀 계측기기는 '토목'과 '전자'를 함께 알지 못하면 도저히 개발할수 없는 것들입니다"

6년간의 연구끝에 95년 선보인 음파수위계와 98년 내놓은 초음파 다회선 유량계는 98년부터 서서히 매출로 이어지기 시작했다.창민테크는 전량 수입에 의존해온 국내 유량계 및 수위계시장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며 98년 한해에만 51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

그리고 99년에는 1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국내 시장점유율 9.2%로 1위를 기록,기염을 토했다.각종 강과 댐,하수관 등을 관리해야하는 공공부문시장에서 잇따라 외산을 대체한 것.99년부턴 드디어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한국수자원공사,지자체 상하수도사업소,농업기반공사,하수 및 오폐수처리장,홍수통제소,한전,토지공사,산림청,지하수관련 지자체 등 물과 관련된 공공기관이 주납품처다.

99년말 액면가의 10배가 넘는 조건으로 증자를 한 데이어 2000년 7월 코스닥에 입성하면서 남 사장은 그 지긋지긋한 돈문제로부터 해방된다.

그는 증자와 코스닥등록을 통해 확보한 현금으로 100억원의 채무를 모두 갚았다.그리고 250억원의 유보금을 확보했다.

"12년간의 '자금담당 상무'역을 이제 끝냈죠.CEO 역은 올해부터 하는 셈입니다"코스닥등록으로 14년간 시달려온 '돈문제'를 훌훌 털어버린 창민테크는 2000년부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168억원의 매출에 32억원의 순이익을 올린 데이어 올해는 무려 277억원에 65억원의 순익을 장담하고 있다. 요즘 남 사장의 화두는 '글로벌'이다.

이미 중국에 이어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 등에 지사를 세웠다.유럽시장도 노크하고 있다. 남 사장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세계 1등 유량계 제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게 꿈이란다.

"전세계 유량계 시장은 대략 8조~10조원에 이릅니다.하지만 나라마다 제각각이어서 어느 제품도 시장을 통일하지 못하고 있죠.창민이 해낼 겁니다"

남 사장은 그래서 요즘 마음이 바쁘다.최근 최고급 인력을 확보하는 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다.물에 대한 남상용의 철학은 남다르다.

"물 흐름을 통제하고 수질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양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수도물정화처리장의 경우 약품을 넣을 때 물의 양을 정확히 파악할수 있어야 넣을 약품의 양을 정할수 있는 거죠"

그는 물의 흐름을 통제하고 컨트롤해야하는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유량계 세계 시장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창민테크의 올매 목표는 연간 1300억원에 이르는 국내 유량계 시장의 20%를 차지하는 것.

창민테크, 어떤 회사인가
설립일1988년 1월 4일
자본금27 억원
종업원70 명
연락처(031) 781-4900
홈페이지www.changmin.co.kr
사업영역유량계,수위계 등 환경관련 정밀계측기기 개발업체
경영계획국내 시장점유율 1위고수.해외시장 개척
매출목표-2001년 277억원 -2002년 408.5억원 -2003년 622.7억원

남상용의 코멘트

남 사장은 89년 결혼후 지난해까지 월세로 살다 최근 집을 장만했다."사실 직원들이 모두 집을 산후에 집을 얻을 생각이었습니다.하지만 코스닥등록후 이름이 알려져서인 지 은행에서 좋은 대출조건을 제시해주더라구요.추가 돈 안들이고 담보대출로 집을 얻었죠"

또다른 이유는 코스닥등록 CEO가 월세로 사는 것과 관련,"여차하면 튈려고 하는 게 아니냐","잘난체하는 것 아니냐"하는 이상한 소문들이 무성했던 것도 '전세'를 결행한 동기다.집장만 역시 전공(?)인 담보대출로 해결한 셈.

그가 자신의 지분 25%중 5%를 떼내 직원들에게 액면가에 나눠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남 사장의 꿈은 창민테크를 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미 기술적으로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시장을 평정할 자신이 있습니다.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재단을 만들 생각이란다."뜨거운 가슴으로 벤처창업의 성공을 꿈꾸는 창의력있는 젊은 친구들을 도와줄 생각입니다.담보없이 투자를 해주는 재단을 만들겁니다"

남 사장은 꿈을 위해 벌써 신변정리를 왠만큼 해놨다."저는 절대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을 생각입니다.물론 자그마한 아파트 한채 정도는 사줄수 있지만,그 이상은 절대 불가능합니다.이미 가족들과는 얘기를 끝냈죠"

그리곤 모든 것을 기부나 재단에 넘길 계획이란다."우리나라는 제대로된 기부문화가 없어요.기업가들이 욕먹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직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기부문화가 빨리 성숙돼야 합니다"

남 사장은 '성공했다'는 말을 매우 부담스러워 한다.코스닥등록,250억원의 유보금,3년연속 흑자행진 등을 감안해볼 때 성공을 인정할 법도 하지만 그는 한사코 "아직은 성공한 게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유보금은 우리가 번 돈이 아닙니다.주주들이 주식가치를 높이라고 내놓은 것이지,절대 우리가 번 게 아니죠.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는 성공의 지름길에 대해서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자신이 내뱉은 얘기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직원과의 약속이든,외부 업체와의 약속이든 신뢰가 가장 중요하죠"

그는 134명의 주주들에게 결국 투자금의 30배 정도로 수익을 안겨줬다.남 사장이 제시하는 두번째 성공열쇠는 목숨걸고 사업을 해야한다는 '비장함'이다.그는 단호하게 '목숨'을 거론한다.

"저는 주위에서 창업을 한다고 하면 반드시 자살시에도 보험금을 주는 모회사의 5억원짜리 보험에 먼저들고 시작하라고 합니다.목숨을 걸지 않으면 성공 못합니다"

남 사장이 제시하는 세번째 지름길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CEO는 절대 지분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지분에 얶매이지 말고,자금이 필요하면 과감하게 많은 지분을 내주더라도 투자를 받아야 하고,M&A 등에 유연하게 대처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면 언제라도 CEO를 그만둘 계획이라고 말한다.그리고 회사와 직원이 같이 발전할수 있어야 하는 점도 CEO 들이 빠뜨리지 말아야할 항목이라고 지적한다.

독특한 방법으로 투자자를 끌어모으고,100억원대의 빚더미속에서 무모하리만치 우직하게 14년여의 버틴 창민테크 남상용 사장.

그는 벌써 국내 유량계시장은 물론 세계 시장을 호령할만큼 급성하고 있는 수리,수문산업계의 무서운 다크호스로 우뚝 서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두가지가 눈길을 끌었습니다.그는 A4용지크기로 오린 달력을 이면지로 쓰고 있었습니다.누렇게 바랜 낡은 노트도 시선을 모았습니다.노트에는 책이름들이 연도별로 쭉 적혀 있었습니다.83년 8월부터였습니다.그동안 남 사장이 탐독한 책리스트였습니다.어려운 해에는 1년에 딱 한권을 읽은 해도 있었고,어떤 해는 60권이나 됐습니다.지금까지 총 764권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광일기자 goldpar@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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