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를 읽기 텍스트(readerly text)와 쓰기 텍스트(writerly text)로 구분했다. 바르트에게 있어 '읽기 텍스트'는 독자들이 그저 읽도록 만들어진 책을 의미했다. 반면 '쓰기 텍스트'는 독자가 직접 쓰도록 유도하는 책이다.
바르트는 이런 구분을 통해 독자는 텍스트의 단순한 소비자일 뿐이라는 기존 관념에 반기를 든다. 독자들 역시 텍스트의 생산자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는 '탈중심'이란 관점에서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다. 저자의 권위 중 상당 부분은 독자들에게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조지 란도의 '하이퍼텍스트 3.0' 은 정보기술(IT)과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하이퍼텍스트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지구화 시대의 비평이론과 뉴미디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문학과 컴퓨터 분야를 아우르는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는 과연 뭘까? 저자는 1965년 테오도르 넬슨이 저술한 '문학기계'란 책에서 그 설명의 출발점을 찾고 있다. (넬슨은 하이퍼텍스트란 용어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다.)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때 나는 비연속적인 글쓰기를 의미한다. 즉 분기점이 있어서 독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며, 상호작용하는 화면에서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링크들로 연결된 일군의 텍스트 덩어리이다."
이처럼 하이퍼텍스트는 텍스트 덩어리와 그것을 연결해 주는 링크로 구성된 텍스트를 의미한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요즘 우리가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텍스트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 요즘 우리가 인터넷에서 접하는 것들이 바로 하이퍼텍스트이다.
(조지 란도는 하이퍼텍스트에 시각 정보, 소리, 애니메이션, 다른 형태의 데이터를 첨가해 하이퍼텍스트 안에 있는 텍스트 개념을 단순 확장한 것을 하이퍼미디어라고 부르고 있다.)
란도가 '하이퍼텍스트'란 제목의 책을 처음 내놓은 것은 지난 1992년이었다. 그 뒤 그는 변화된 기술 상황을 반영해 1997년 '하이퍼텍스트 2.0'이란 개정판을 내놓은 데 이어 2006년 초 '하이퍼텍스트 3.0'을 새롭게 선보였다. (란도가 이 책 제목을 '하이퍼텍스트 3.0'이라고 붙인 것은 요즘 유행에 편승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7년 이 책 2판을 내놓으면서 제목 끝에 2.0이란 숫자를 붙였던 것이다.)
란도는 이 책 서문을 통해 '하이퍼텍스트 3.0'을 펴내게 된 것은 "웹의 엄청난 성장세와 ‘읽고 쓰기(read-write)’ 하이퍼텍스트인 블로그의 발전, 그리고 플래시 등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텍스트에 대한 관심 증가 등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하이퍼텍스트 3.0'을 통해 저자는 읽기, 쓰기와 함께 링크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그는 아예 "웹이 발전하면서 능동적인 읽기가 한층 활기를 띠게 됐다. 이에 따라 우리는 직접 쓰기를 원하는 독자의 모든 작품들이 출판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능동적인 읽기의 밑바탕에는 하이퍼텍스트의 최대 강점인 링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저자인 란도의 생각이다.
하이퍼텍스트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링크는 작가와 독자, 선생과 학생 간의 경계뿐 아니라 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 사이의 경계를 이동시킨다. 특히 링크는 작가, 텍스트, 작품, 읽기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근본부터 뒤바꿔놓는 효과가 있다. 하이퍼텍스트가 궁극적으로 독자와 저자 간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준다면,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링크라는 것이다.
링크를 기반으로 한 ‘능동적인 읽기’라는 관점에서 란도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블로그이다. 블로그 독자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 환경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의견이 덧붙여진 블로그(commented-on blog)는 트랙백을 통해 적극적인 독자의 텍스트에 연결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론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읽고 쓰기’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란도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해 “다른 형태의 글쓰기나 인쇄물에 비해 독자에게 더 많은 힘을 부여해 주는 것”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조지 란도가 주장하는 읽고 쓰기 텍스트라는 개념은 요즘 포털과 각종 온라인 매체가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UCC(이용자 제작 콘텐츠)의 이론적 바탕이라고 해도 크게 그르지 않을 것 같다. UCC를 통해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이 란도의 ‘능동적인 독자’이며, 이들이 쓰는 글을 ‘읽고 쓰기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란도의 '하이퍼텍스트 3.0'은 월드와이드 웹으로 대표되는 요즘 인터넷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요즘 웹 2.0을 앞세운 사람들은 마치 웹 2.0이란 개념이 2005년 무렵 오라일리란 IT 전문 출판사에서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인양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팀 오라일리가 처음 웹 2.0이란 개념을 처음 제시한 것은 맞다.
하지만 웹 2.0은 팀 오라일리가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은 아니다. 실제로 하이퍼텍스트에 대해 공부해보면, 웹 2.0에 대한 과도한 숭배가 얼마나 부박한 처사인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바네바 부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이란 논문을 발표한 이래 독자들이 저자처럼 참여하는 인터넷,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는 인터넷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들이 계속되어 왔다. (요즘 유행하는 웹 2.0은 이런 심오한 사상들을 먹기 좋게 살짝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조지 란도의 '하이퍼텍스트 3.0'은 이런 내용들과 함께 문학, 철학 등 인문학 분야와 컴퓨팅 분야가 서로 수렴하는 최근의 상황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 그는 자크 데리다, 롤랑 바르트 등 저자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던 많은 사상가들의 생각들과 컴퓨팅 분야 이론가들의 사상들이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3.0'은 인문, 사회과학과 컴퓨터 공학의 행복한 만남을 꾀하는 책이라고 해도 크게 그르진 않을 것 같다.
물론 '하이퍼텍스트 3.0'은 읽어내기 쉬운 책은 아니다. 600쪽에 달하는 두께는 둘째 치더라도 문학이론과 철학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들 때문에 독파하기까지 꽤 많은 인내심을 요한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어내고 나면, 블로그를 중심으로 한 최근의 인터넷 현상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백 한 가지.
사실 기자는 이 책 번역자이다. 자기가 번역한 책을 서평이랍시고 올리는 것이 '불공정'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분야의 좋은 책을 소개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다른 기자 이름을 빌어서 소개하는 것은 더 불공정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직접 소개하기로 했다.
소개하면서 역자 서문으로 썼던 부분을 꽤 많이 '재활용'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린다.
(조지 란도 지음/ 김익현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3만3천원)
/김익현기자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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