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지하는 1970년 '오적'이란 시를 썼다. 을사 5적을 빗댄 그의 시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 당시 상류층의 부패 상황을 통렬하게 비판해 많은 공감을 샀다. 특히 김지하는 재벌, 국회의원 등 '오적'을 모두 원숭이를 뜻하는 한자어로 표현해내 웃음을 자아냈다.
갑자기 김지하를 떠올린 건 2일 저녁 한 바탕 소동을 몰고온 '미네르바 파동' 때문이다. 모 신문 논설위원이 '미네르바 자술서'란 칼럼을 통해 커밍아웃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증권가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몇몇 언론들은 "미네르바는 **신문 ** 논설위원"이란 기사를 발 빠르게 써냈다.
시끌벅적했던 미네르바 소동은 해당 언론사 측이 "패러디 칼럼이었다"고 해명하면서 싱겁게 끝났다.
기자는 미네르바 소동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미네르바 자술서'란 칼럼을 찾아서 읽었다. 언뜻 봐도 참 잘 쓴 글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소동 소식을 알기 전 그 글을 봤으면 바로 속보를 쐈을 듯 했다. 몇몇 네티즌들이 "자세히 읽어보면 미네르바가 아니란 걸 알텐데, 언론사가 그것도 구분 못하나"고 비판하고 있는가 본데, 내 보기엔 그건 결과론일 따름이다.
그 동안 사이버논객 '미네르바'의 정체를 놓고 많은 추측들이 있었다. 한 때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미네르바 후보'로 거론됐을 정도다. 독일 유학파 경제학도에다 신랄한 글쓰기 방식 때문이었다. 자칭 타칭 미네르바가 100명은 된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사 논설위원이 "정부와 언론은 날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길 바란다"며 자술서를 썼으니, 누가 믿지 않겠는가? 이걸 패러디라고 웃고 넘길 수 있는 것일까?
이번 소동이 잦아든 후 몇몇 언론사들이 조롱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평소 발빠른 속보로 유명했던 A경제지와, 한 때 '안티 운동'의 타깃이 됐던 C종합지가 '미네르바 낚시'의 희생양이 됐다.
결과적으로 오보를 냈으니, 언론사 입장에서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공신력 있는 매체가 전 언론과 독자를 상대로 한바탕 '장난'을 친 대목은 그냥 웃고 넘겨도 될 일일까?
물론 언론이라고 패러디와 풍자를 하지 말란 법은 없다. 더구나 사실을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기사도 아니고 칼럼인 만큼,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결코 비판받을 이유는 아니다. 신문 칼럼이라는 게 원래 딱딱한 세상 얘기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 아닌가?
하지만 '미네르바 자술서'에선 이런 풍자와 패러디보다는 '낚시' 냄새가 너무나 진하게 났다. '미네르바에 휘둘리는 정부'를 조롱하기보다는, '미네르바 자술서'에 휘둘리는 언론과 독자를 조롱하는 듯 해서 불쾌한 마음도 적지 않다.
'미네르바 자술서' 소동이 커지자 해당 언론사는 잠깐 칼럼을 내린 뒤 '추신'을 덧붙여 새로 올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보니 칼럼 제목이 '가짜 '미네르바 자술서''로 바뀌어 있다. 이 칼럼의 시작이 패러디였다면 '패러디 장치 부재'를 자인한 셈이다. 시작부터 '낚시'를 염두에 뒀다면 대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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