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보기술(IT) 대기업들이 대규모 시설투자 계획을 밝혔다가 뒤늦게 축소 또는 철회하면서 관련업체들에게 혼란을 안겨주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 의사소통 체계를 고도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LG필립스LCD(LPL)는 지난 1일 5.5세대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제조라인에 5천500억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백지화했다. 지난 해 투자 계획을 발표한 지 1년 여 만에 없던 일로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찍이 5.5세대 제조공정에 맞춰 장비 및 부품 공급을 준비했던 중소기업들은 미리 제작해둔 제품들을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LPL이 불성실공시로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투자를 철회한 것처럼, 대규모 투자계획의 변경에 따른 혼란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등 IT 분야에서 불가피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진다.
빠르게 움직이는 시장의 공급과 수요, 제품가격 및 기술발전 양상에 따라 대기업이 수개월 전에 밝힌 투자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업의 투자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부품·장비업체 입장은 다르다. 대기업의 공정 가동에 따른 납품을 원활히 하기 위해 3~6개월 정도 미리 제품을 양산해둬야 하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대기업과 납품업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시장동향에 대응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활발한 의사소통으로 시장의 흐름에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협단체 중심 정보교류·세미나 활성화돼야
LPL이 5.5세대 투자를 철회하기까지 몇 세대 라인에 투자할 것인가를 놓고 추측이 난무했다. LPL이 다시 올해 말까지 투자계획을 확정하겠다고 밝히면서 8세대 라인에 투자할지, 그 이후 차세대에 자금을 투입할지에 대해 국내외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게다가 패널의 수요와 공급 양상이 빠르게 바뀌면서 글로벌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어, LPL이 쉽사리 투자계획을 밝히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기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5.5세대용으로 제작한 제품을 처리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품업체들은 향후 투자계획만이라도 하루 빨리 밝혀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중소기업연구원의 김승일 박사는 이러한 IT 대기업의 투자관행 및 납품업체들의 혼란에 대해 "대기업과 협력업체가 3~5년을 내다보며 산업동향에 대해 면밀히 정보를 교류해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단기 사안에 대해선 각자가 일정 정도 위험부담을 안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견해를 밝혔다.
정부와 대기업이 나서 일방적으로 협력업체를 지원하는 상생모델만으론 혼란을 극복하긴 어렵다는 설명이다. 다행히 최근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가 출범함으로써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 활발한 소통을 위한 장이 마련됐다.
협회는 대·중소기업 회원사 간 상호교류를 위해 업무별 담당자들의 토의나 워크숍, 정기모임 등을 주선한다는 방침이다. 협회가 대기업과 협력업체를 한 덩어리로 묶을 수 있는 구심점이 되는데 더욱 역점을 둬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 박사는 "산업별로 협의체가 구성돼 활발한 의사소통으로 시설투자 및 부품·장비 납품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일이, 대·중소기업 간 상생을 위해 절실히 요구된다"고 말했다.
◆구두발주 근절돼야…정식 납품계약 시점 앞당길 필요도
과거부터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 불공정거래의 근원이 됐던 게 말 한 마디로 납품을 요구하는 구두발주 행위. 기업 간 지위 차이에 따른 구두발주가 여전히 빈발하고 있어, 이에 대한 정부와 업계의 공동 대응책 마련도 시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 부품업체 부장은 "보통 대기업 구매팀에서 투자계획에 따른 물량을 구두 내지 법적 구속력이 없는 e메일로 요구하기 때문에, 납품업체들은 뒤에 문제가 생겨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경쟁까지 유발시키는 상황에서, 중소기업들은 구두발주라도 신속히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또 다른 장비업체 대표는 "부품·장비업체들이 대기업의 시설투자에 따른 납품일정을 맞추려면 최소 3개월 이상 시일이 걸리는데도, 정식계약은 납품을 불과 1개월 정도 앞두고 이뤄지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밝혔다.
대기업이 시장동향에 따라 면밀하게 투자계획을 잡고, 협력업체들에 대한 정식발주 시점을 앞당겨 주는 일 또한 상생협력을 위해 요구되는 전제조건이라는 것.
한편 인텔이나 도요타와 같은 해외 글로벌기업들은 기술개발 단계부터 협력사들과 손을 잡고, 대기업들의 투자계획에 따른 납품업체들의 선투자분을 보전해주는데도 적극 나서고 있어 벤치마킹에 나설 필요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권해주기자 postma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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