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개혁과 미래, 특별 기고] ② 유엔의 정의·법치·책임성 : 법의 지배인가, 권력의 지배인가?

[유엔 개혁과 미래, 특별 기고] ② 유엔의 정의·법치·책임성 : 법의 지배인가, 권력의 지배인가?

김은주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aSSIST) 석좌교수

[사진=김은주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aSSIST) 석좌교수]

[아이뉴스24 정유림 기자] 한국 대법원은 2016년, 국민의 권익을 제한하는 행정 처분에서 사전통지나 의견 제출 기회를 보장하지 않았다면 법정 예외가 없는 한 위법하다고 판시했다(2016두41811). 아무리 조직이 정당한 목적을 내세워도 법이 정한 절차를 생략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내 법원의 관할로부터 면제되는 국제기구에서는 누가 같은 원칙을 지킬 것인가?

그 역할을 맡은 곳 중 하나가 관할을 인정한 58개 국제기구의 현직·전직 직원에게 권리구제의 통로를 제공하는 국제노동기구 행정재판소(ILOAT)다. 1927년 국제연맹 행정재판소에서 출발한 ILOAT는 세계보건기구(WHO), 식량농업기구(FAO), 유네스코,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등 관할을 인정한 국제기구 내의 분쟁을 심리한다. 한국에 본부를 둔 녹색기후기금(GCF)과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도 그 관할에 속한다. 유엔 사무국 직원은 별도의 UNDT·UNAT 체계에서 권리를 구제받는다.

ILOAT 판례는 수십 년간 임용·승진·연금·징계 같은 단순한 인사분쟁을 넘어 괴롭힘, 권한 남용, 조사 독립성, 지도부 책임과 판결 이행 문제로 발전해 왔고, 그 건수도 크게 증가했다. 위법한 결정에 따른 배상과 소송비용은 해당 국제기구의 재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제기구의 신뢰는 인권과 법치를 외부에 설파하는 데서가 아니라 자체 조직 안에서도 똑같이 실천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반복되는 위법 결정과 지도부의 책임

ITU 관련 공개 판결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2022년 제4516호와 제4578호 판결은 권한남용과 괴롭힘 신고에 대해 규정상 의무적인 조사를 실시하지 않은 결정을 위법하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명했다. 2026년 제5118호와 제5213호 판결에서도 같은 피신고인에 대한 권한남용과 괴롭힘 신고를 적용 규정에 따라 조사하지 않고 종결한 결정들이 취소됐다. 분쟁이 진행되는 동안 새 규정까지 도입하면서 해당 피신고인에 대한 독립적 조사를 외면하고 기존 규정과 앞선 판결을 존중하지 않은 동기가 핵심 문제다.

이 판결들의 거시적 의미는 개별 사건의 승소 차원을 넘어선다. 왜 ITU는 명확한 조사 의무와 앞선 판례에도 불구하고 위법한 결정을 계속 반복했는가. 같은 피신고인에 대한 신고에서 의무적인 조사를 회피하고, 여러 차례 위법한 종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무엇인가. 반복된 위법 결정이 단순한 행정착오였는지, 책임 있는 조사를 피하려는 의도적 결정이었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공개 판결에 명시된 그 피신고인이 누구인지도 공적 책임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유엔의 주체인 회원국들이 일정한 임기로 선출한 기관장에게도 독립적인 조사와 책임 규명, 후속 조치가 예외 없이 적용되도록 감독하지 않는다면 의혹과 불신은 해소되기 어렵다.

이처럼 권한남용과 관련된 수많은 판결과 피해를 호소하는 많은 직원들의 법적 대응에서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미국 국적의 도린 보그단마틴 ITU 사무총장이다. 그녀는 선거 홍보자료에서 지난 약 4년간의 투명성과 책임성 강화를 성과로 내세우며 오는 9일 도하에서 개막 예정인 ITU 전권회의(PP-26)의 사무총장 선거에 유일하게 등록된 후보다.

한국을 포함해 선출권을 가진 회원국들은 ITU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 후보의 영향력이나 국적, 정치적 지지를 넘어 누적된 거버넌스 문제와 판결의 투명한 이행, 규정 변경을 통한 조사 회피 의혹, 이해충돌 방지에 관해 설명을 요구하고 제도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

2026년 유엔 사무총장 선출에는 총 9명이 공식 지명됐는데, 왜 ITU 사무총장 선거에는 단독 후보만 나섰을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이 국가 간 힘의 불균형을 드러낸다면, ITU뿐 아니라 다른 국제기구 내부에서도 법의 지배보다 권력의 지배가 앞서는 것은 아닌지 물을 필요가 있다.

이는 특정 국가나 개인을 단죄하려는 질문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같은 규칙이 적용되는가를 묻는 질문이다. 한국 법원에는 통상 여러 심급과 국내 집행 장치가 있지만, ILOAT는 원칙적으로 최종심이며 직접 조사나 고위직 징계를 수행하지 않는다. 판결 이후에도 조직이 실질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국제기구나 그 수장이 이러한 제도의 한계를 악용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장기간의 재판 끝에 판결이 나올 때는 위법한 결정을 내린 책임자의 임기가 이미 끝나기도 한다. 그에 따른 배상금은 위법한 결정을 내린 개인이나 권한남용으로 피해를 가한 피신고인이 아니라 회원국 국민의 세금이 포함된 기구의 재원으로 충당된다.

공공 신뢰 회복을 위한 회원국과 시민의 역할

이러한 불투명하고 무책임한 거버넌스는 왜 유엔에 대한 공공 신뢰가 중요한지를 다시 묻게 한다. 전쟁과 인권, 기후위기, 디지털 격차처럼 한 나라가 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세계 시민과 회원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다자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위법과 불공정이 지속적으로 방치되면 유엔이 외부에 요구하는 가치와 원칙의 설득력까지 약해지고, 시민은 신뢰뿐 아니라 기대도 잃게 되며, 유엔에서 꿈을 펼치려는 미래세대의 희망마저 꺾게 된다. 반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과정을 공개하며 함께 개혁해 나간다면 유엔의 정당성과 협력 기반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유엔에 대한 공공의 신뢰 문제를 다룬 저서 'Public Trust in the United Nations'에서 관련 판결과 제도 개혁 사이의 간극을 분석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그 연장선에서 제안하는 유엔 공공신뢰지수(UNPTI)는 유엔 및 주요 국제기구의 내부 거버넌스를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비교·분석·평가해 책임 있는 개선과 개혁을 촉진하자는 구상이다.

이는 유엔 기구 유치와 기반시설 조성을 넘어, 검증 가능한 평가 내용을 개발해 공공의 감시를 강화하고 국제기구들이 투명한 거버넌스를 위해 경쟁하는 여건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관심 있는 국가와 기관들이 이러한 신뢰 회복에 동참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한국을 포함한 회원국은 국민이 부담하는 분담금이 적정하게 사용되고, 위임된 권한이 법치에 따라 행사되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국회·정부·학계·시민사회와 언론은 국제기구의 선거·예산·인사뿐 아니라 직원들의 근무환경, 신고 처리와 판결 이행, 후속 조치를 사실에 근거해 추적하고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유엔의 신뢰는 정상이나 기관장들의 구호와 선언만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최고위직에도 예외 없는 독립적 조사와 법의 적용, 판결의 성실한 이행, 투명한 책임 규명을 제도화하는 개혁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각 국제기구가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고, 그 거버넌스에 대한 신뢰를 다시 쌓아 미래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김은주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aSSIST) 석좌교수는? 김 교수는 국제 정보통신기술(ICT), 인공지능(AI), 디지털 정책, 유엔(UN)·외교 분야 전문가로, 40년에 걸쳐 유엔 체계와 공공·민간 부문, 연구기관·학계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아왔다. 서울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런던대학교에서는 유엔, 특히 국제전기통신연합(ITU)과 유네스코(UNESCO)를 연구해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 옥스퍼드대학교, 유엔 지식센터에서 리더십, 조직관리, 개발·데이터 과학 분야의 전문 과정도 이수했다. 2000년부터 2025년까지 ITU에서 고위 리더십 직책을 맡아 국제협력, 디지털 발전·제도 혁신에 기여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교육, 연구·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특별 기고는 유엔 창설 81주년을 맞아 유엔의 가치와 역할, 개혁 과제와 대한민국의 기여를 폭넓게 살펴보기 위해 총 6회로 진행된다.

/정유림 기자(2yclever@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