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설재윤 기자]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로 사우디아라비아 홍해 연안에서 아시아로 원유를 운송하는 유조선의 장거리 우회가 이어지고 있다. 운항 기간이 길어지면서 시장에 투입할 수 있는 선박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나자 유조선 운임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국내 해운사들이 실제로 얻는 수혜는 선박별 장기계약 여부와 운임 산정 방식, 연료비 부담 등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4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예멘 친이란 후티 반군의 상선 공격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무력 충돌로 홍해 남쪽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항행 위험이 커지고 있다. 이에 국내행 유조선들은 지난 8월 중순부터 바브엘만데브 해협 대신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고 있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얀부항에서 원유를 실어 국내로 운송한 20번째 선박이 지난 1일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한국으로 향하고 있다.
해당 선박은 얀부항에서 북쪽 수에즈 운하를 거쳐 지중해로 빠져나온 뒤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한국으로 들어오는 장거리 항로를 이용한다. 항로 선택은 선사와 원유 화주가 결정했으며, 선박 이름과 운항사는 안전을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앞서 국내행 선박들은 얀부항에서 원유를 싣고 홍해 남쪽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과했다. 그러나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연관된 선박에 대한 공격을 경고하고 얀부 인근에서 유조선 피격 사건까지 발생하자 보다 안전한 북쪽 항로를 선택하고 있다.
만재한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은 수에즈 운하의 수심 제한으로 통항 과정이 복잡해질 수 있다. 원유 일부를 육상 송유관으로 보내 선체를 가볍게 한 뒤 운하를 통과하고, 지중해 쪽에서 다시 적재하는 방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장거리 우회는 정유사에는 원유 도입 기간과 물류비가 늘어나는 부담이다. 반면 유조선 시장에서는 선박 한 척이 한 차례 운송에 투입되는 기간이 길어져 가용 선박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난다.
실제로 중동·아시아 주요 항로의 VLCC 운임은 지난달 사상 최고 수준까지 오른 뒤 일부 조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얀부에서 한국 울산으로 향하는 항로에서도 높은 운임에 계약이 체결되는 등 탱커 공급 부족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국내에서는 HMM과 현대글로비스, 팬오션 등이 유조선 선대를 운영하고 있다. 다만 최근의 높은 스팟 운임이 이들 회사의 수익에 반영되는 정도는 각각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HMM은 지난해 말 기준 탱커 17척을 운영하고 있다. 회사는 VLCC의 전략적 운용과 장기운송계약 확대를 통해 벌크사업 수익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증권가에서는 HMM의 3분기 영업이익을 8000억~1조원 수준으로 예상하고 있다. 주력인 컨테이너 부문이 실적 개선을 이끌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탱커 시황 강세도 벌크사업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3분기 역대 최대인 5665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현대글로비스도 VLCC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최근 장기용선을 포함해 총 12척의 VLCC를 확보하며 자동차운반선 중심의 사업구조를 다변화하고 있다.
현대글로비스의 3분기 해운사업 매출은 1조813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7.1%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2279억원으로 16.6% 늘었다. 고운임 비계열 화물 확대와 원가 효율화, 자동차운반선 사업 호조가 실적 개선을 이끌었다.
유조선 운임 상승은 향후 해운사업에 긍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장기계약에 투입된 VLCC는 스팟 운임이 급등하더라도 계약기간 중 받는 운임이 즉시 바뀌지 않아 단기 수혜는 제한적일 수 있다.
팬오션도 유조선 사업을 확대하고 있지만 당장의 시황 상승이 곧바로 실적 개선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팬오션은 올해 SK해운으로부터 VLCC 10척을 인수하기로 했고, 신조 VLCC 발주와 장기운송계약도 확대하고 있다.
팬오션 관계자는 "현재 운항 중인 유조선 대부분이 장기계약이나 선박을 통째로 빌려주는 대선계약으로 묶여 있어 스팟 운임이나 용선료 상승이 당장 수익으로 연결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우회 운항에 따른 비용 부담도 변수다. 화물을 운송하는 선사가 연료비를 부담하는 계약이라면 운항 거리가 늘어날수록 유류비와 운하 통행료, 보험료 등도 함께 증가한다.
운임이 이동 거리에 비례해 책정되는지, 한 차례 운항을 기준으로 고정되는지도 중요하다. 항차당 고정 운임을 받는 계약에서는 장거리 우회로 늘어난 운항 기간과 연료비를 선사가 부담해야 해 매출이 늘더라도 수익성은 오히려 악화할 수 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중동 항로의 장거리 우회가 이어지면 유조선의 실질적인 공급이 줄어 스팟 운임과 용선료에는 상승 압력이 가해진다”며 “다만 장기·스팟계약 비중과 연료비 부담 주체가 달라 모든 선사가 같은 수준의 수혜를 얻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탱커 시황 강세가 실제 국내 선사들의 실적에 얼마나 반영되는지는 계약 조건과 향후 중동 정세를 함께 지켜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설재윤 기자(jyseol@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