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반 30년, 밥상의 변화] ③"집밥 줄어도 쌀은 팔린다"⋯햇반이 연 농가 상생의 길

[햇반 30년, 밥상의 변화] ③"집밥 줄어도 쌀은 팔린다"⋯햇반이 연 농가 상생의 길

1인당 쌀 소비량 30년 새 반토막⋯가공식품이 수요 견인
CJ제일제당 국산 쌀 구매 81배 증가⋯연간 6만5000톤
전국 2500여 농가와 계약재배⋯안정적인 판매처 마련
전용 미곡처리장 구축·품종 개발⋯지역 농업기반 강화

[아이뉴스24 구서윤·설래온 기자] 집에서 밥을 짓는 가구가 줄어드는 사이 즉석밥이 국내 농가의 새로운 판로로 자리잡고 있다. 비상식에서 일상식으로 변신한 햇반이 국산 쌀 소비를 뒷받침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 것이다.

쌀 구매에서 시작된 기업과 농가의 협력은 계약재배와 생산시설 구축, 전용 품종 개발로 확대되고 있다. 가정의 밥솥에서 줄어든 쌀 수요 일부가 식품공장의 밥솥으로 옮겨가면서 농업과 식품산업을 잇는 새로운 상생 구조가 형성되는 모습이다.

지난 30년간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절반 수준으로 줄었지만 CJ제일제당의 국산 쌀 구매량은 80배 넘게 늘었다. 현재 전국 14개 지역 약 2500개 농가가 햇반과 관련 제품에 사용할 쌀을 공급하고 있다.

국립농업박물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벼와 허수아비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7일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3.9㎏으로 전년보다 3.4% 감소했다. 햇반이 처음 등장한 1996년 104.9㎏의 절반 수준이자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저치다. 하루 평균 쌀 소비량도 147.7g에 그쳤다.

반면 식품 제조에 사용되는 쌀은 새로운 소비처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식료품·음료 제조업체에서 사용한 쌀은 106만5324톤으로 전년 대비 22% 증가했다. 이 가운데 즉석밥 등을 포함하는 '기타 식사용 가공처리 조리식품 제조업'에 사용된 쌀은 15만2800톤이었다. 가정에서 직접 밥을 짓는 수요가 줄어드는 사이 가공식품이 쌀 소비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CJ제일제당의 햇반이다. 2001년 800톤에 불과했던 국산 쌀 구매량은 2015년 2만여 톤, 2020년 4만6000여 톤으로 늘었다. 지난해에는 6만5000여 톤으로 2001년 대비 81배 이상 증가했다. 20㎏ 쌀 포대로 환산하면 연간 약 325만포대에 달한다.

전남 해남군 산이면에서 한 농부가 콤바인을 이용해 벼를 수확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산 쌀 구매 확대는 농가의 판로 확보로 이어졌다. 회사는 2010년부터 충남 아산과 충북 진천, 전북 익산 등 주요 쌀 생산지역에서 계약재배를 추진해 왔다. 현재는 전국 14개 지역 약 2500개 농가에서 햇반용 쌀을 공급받고 있다.

계약재배의 핵심은 안정적인 수요다. 쌀값 변동과 소비 감소로 판매처 확보가 중요해진 농가 입장에서는 정기적인 구매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농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 기업 역시 일정한 품질의 원료곡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어 양측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아산 지역 계약재배에 참여하고 있는 한 농민은 "직접 지은 쌀이 대한민국 대표 제품인 햇반에 들어간다는 자부심이 크다"며 "밥 짓는 가구는 줄고 있지만 가공용 쌀이라는 확실한 소비처를 든든하게 확보해 준 덕분에 마음 놓고 안정적으로 농사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협력은 생산·가공시설 구축으로도 확대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충남 아산시에 조성된 햇반 전용 종합미곡처리장(RPC)이다. 약 1만8000㎡ 규모의 시설에는 벼 건조·저장시설과 사일로, 현미가공공장, 도정시설 등이 들어섰다. 수확한 벼의 보관부터 선별과 가공까지 한곳에서 관리할 수 있다.

충남 아산 종합미곡처리장 '선도농협 현미가공공장'. [사진=CJ제일제당]

시설 구축에는 기업과 지방자치단체, 지역농협이 함께 참여했다. CJ제일제당은 미곡 처리 설비를 지원하고 충남도와 아산시는 설립 비용을 분담했다. 운영은 아산선도농협이 맡고 있다. 농가는 수확한 벼를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고 기업은 원료곡의 품질과 수급을 관리하는 구조다. 단순한 구매계약이 지역 농업 기반시설 확충으로 이어진 셈이다.

지역 쌀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이천과 아산 등 주요 산지의 쌀을 활용한 햇반 제품을 선보이며 지역별 품종과 특성을 소비자에게 알리고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여주로 협력 범위를 넓혔다. CJ제일제당은 여주시와 여주시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 이마트와 협력해 여주 지역 품종인 '진상미'를 활용한 '햇반 여주쌀밥'을 선보였다. 지역 농가에서 생산한 쌀을 가공식품으로 상품화해 새로운 소비처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한 전용 벼 품종 개발도 상생의 새로운 축이다. CJ제일제당은 자체 개발한 가공용 벼 품종 '동행'을 2022년 국립종자원에 품종출원했다. 회사 측에 따르면 동행은 기존 품종보다 수량성이 우수하고 주요 병해에 대한 저항성을 갖추도록 개발됐다.

지난해에는 아산선도농협을 통해 약 1만톤 규모의 동행 품종 계약재배를 진행했다. 올해는 이를 1만2000톤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아산시농업기술센터와 작황 조사 및 재배 분석도 진행하며 생산 안정성을 높이고 있다.

김정수 충남 아산 선도농협 이사. [사진=CJ제일제당]

농가가 생산한 쌀을 구매하는 데서 나아가 재배할 품종의 개발과 생산성 향상에도 기업이 참여하는 것이다. 농가는 수확량과 병해에 따른 불확실성을 줄이고 기업은 즉석밥 생산에 적합한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만 가공용 쌀 소비 확대만으로 국내 쌀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전체 쌀 소비량 감소가 장기간 이어지는 데다 가공용 쌀 시장에서도 가격과 품질, 수입 원료와의 경쟁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계약재배 역시 구매 물량과 가격 조건, 품종 선택에 따라 농가가 체감하는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가공용 쌀 수요를 지속해서 늘리는 동시에 농가의 안정적인 소득과 연결되는 거래 구조를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햇반을 중심으로 한 쌀 가공제품이 국산 쌀 소비 확대와 농가 상생에 기여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다"며 "앞으로도 국산 쌀 계약재배 물량을 지속해서 늘리고 국내 쌀 가공식품 시장의 성장을 이끌겠다"고 말했다.

30년 전 햇반이 처음 등장했을 때 즉석밥은 집에서 밥을 짓기 어려운 상황에 찾는 대안에 가까웠다. 그러나 가정의 쌀 소비가 줄어드는 동안 햇반은 농가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통로로 성장했다.

밥을 짓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한 끼의 시작은 여전히 논에 있다. 햇반이 지난 30년간 넓힌 것은 즉석밥 시장만이 아니다. 농가가 생산한 쌀이 변화한 식생활 속에서도 소비자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길도 함께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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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구서윤 기자(yuni2514@inews24.com),설래온 기자(leonsign@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