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양찬희·김재환 기자] “저를 못 알아봐 주셔도 괜찮아요. 그 캐릭터를 기억해 주시면 저는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배우에게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배우 김혜원은 자신의 이름보다 작품 속 인물이 먼저 기억되기를 바란다.
다른 작품을 보던 관객이 뒤늦게 같은 배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김혜원이 꿈꾸는 배우의 모습이다.
김혜원은 지난 16일 경기도 고양특례시 일산의 ‘미스퀸즈’에서 진행한 아이뉴스24와의 인터뷰에서 “캐릭터마다 입는 색깔을 제대로 소화해 그 캐릭터 자체로 살아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바람은 촬영장 밖의 생활로도 이어졌다. 어려운 시대적·환경적 여건에 놓인 여공 반장을 연기할 때는 자료 사진 속 생활환경과 최대한 비슷한 고시원에 방을 얻었다. 임신한 인물을 맡았을 때는 무게를 더한 임산부 분장용 배를 착용하고 생활했다.
역할을 준비하는 과정은 일상의 작은 습관까지 바꿨다.
무대와 드라마, 영화 등을 오가며 활동해 온 16년. 김혜원은 어떤 인물을 만나더라도 작품 안에서 그 인물 자체로 살아 숨 쉬는 배우를 꿈꾸고 있다.

◇ 아홉 살, 방송국의 빨간 불이 켜지던 순간
김혜원이 방송 일을 꿈꾸게 된 순간은 아홉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를 따라 KBS ‘아침마당’ 스튜디오를 견학하던 날이었다. “하이 큐!”라는 소리와 함께 방송 중임을 알리는 온에어(ON AIR) 표시등에 빨간 불이 켜졌다.
김혜원은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냥 직관적으로 ‘이게 내 운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홉 살짜리가요.”
어린 시절부터 공연을 보는 일도 좋아했다. 어머니와 대학로에서 뮤지컬을 관람할 때면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아쉬웠다. 자신도 무대에 올라가고 싶었다.
아역 배우를 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하며 상처받을 것을 걱정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에 충실하고 성인이 된 뒤에도 같은 꿈을 갖고 있다면 도전해보자는 뜻이었다.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마친 뒤 아버지가 먼저 연극영화과 진학을 권했다. 여전히 배우가 되고 싶다면 준비해보라는 말이었다.
김혜원은 수능이 끝난 뒤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정식으로 연기 지도를 받은 횟수는 네 차례였다. 짧은 준비 끝에 인하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당시를 두고 “입시 때 준비한 작품이 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며 “여러 가지가 잘 맞아떨어졌고 운도 좋았다”고 돌아봤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연기에 몰두했다. 학교에 다니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KBS ‘TV쇼 진품명품’에 보조 MC로 출연했고 배우 활동과 MC 활동을 병행했다.
미인대회 도전은 그 이후였다.
김혜원은 “미인대회에 나간 뒤 배우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아는 분들도 있지만 순서는 반대”라며 “배우와 MC로 활동하던 중 지인의 추천을 받아 미인대회에 도전했다”고 설명했다.
미인대회에서 얻은 경험과 성취도 소중하지만 활동의 출발점과 중심에는 연기가 있었다.

◇ 끝난 오디션에 걸었던 전화 한 통
김혜원에게 연극 ‘옥탑방 고양이’는 유독 애착이 남는 작품이다.
공연하고 싶은 작품을 찾기 위해 매주 대학로를 다니던 때였다. 객석에서 ‘옥탑방 고양이’를 본 뒤 주인공 ‘남정은’을 연기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오디션은 이미 끝난 뒤였다.
김혜원은 제작사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오디션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 역할을 꼭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시 기회가 주어졌고 김혜원은 남정은 역을 맡게 됐다.
“너무 하고 싶었던 작품과 역할이었어요. 오디션을 보게 된 과정까지 더해져서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이후 약 6개월 동안 공연하며 남정은으로 살았다. 대학로와 강남, 지방 공연장을 오가며 관객을 만났다.
매일 무대에 올라 같은 인물의 삶을 이어가는 일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만만하지 않았다. 공연을 마친 뒤에도 한동안 여운이 남았다.
그만큼 배우로서 얻은 것도 컸다.
김혜원은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배우로서 희로애락을 많이 느꼈고 인간적으로도, 배우로서도 많이 성장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연극 무대에서 쌓은 경험은 드라마 촬영에도 도움이 됐다.
김혜원은 즉흥적인 상황에 빠르게 대응해야 하는 연극의 특성이 촬영 현장의 변화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짧은 시간 안에 대본을 숙지하고 인물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 캐릭터로 살아가는 ‘빙의’,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바꾼 생활
김혜원은 자신이 지향하는 연기를 ‘빙의’라는 말로 설명했다. 인물의 말과 행동을 표현하는 데서 나아가 그 인물 자체로 살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자신의 이름 앞에 붙기를 바라는 수식어로도 ‘빙의 전문 배우’와 ‘믿고 보는 배우’를 꼽았다.
“제가 김혜원이기 때문에 김혜원을 연기할 필요가 없잖아요.”
처음 연기를 시작할 무렵에는 화면에 예쁘게 나오는 모습에 신경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을 거치며 우선순위가 달라졌다. 예뻐 보이는지보다 인물에 어울리는지,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됐다.
캐릭터를 준비할 때는 인물이 살아온 환경과 성격, 취향, 인간관계, 건강 상태와 삶의 목적을 연구한다. 특히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인물의 ‘결핍’이다.
“모든 사람은 내면에 각자 가진 결핍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을 파악하는 게 중요해요.”
분석을 마치면 일상에서도 인물의 감각을 이어가려 한다. 걸음걸이와 호흡, 말투를 바꾸고 듣는 음악이나 향수도 달리한다. 사극을 준비할 때는 향수를 쓰지 않고 사극풍의 음악을 들으며 생활했다.
KBS 드라마 ‘그 여자의 바다’에서 여공 반장 ‘이경희’ 역을 맡았을 때는 어려운 시대적·환경적 여건에 놓인 인물의 결핍을 이해하려 했다.
참고한 자료 사진 속 생활환경과 최대한 비슷한 경기도 수원특례시 인계동의 고시원에 직접 방을 얻었다. 김혜원의 설명에 따르면 침대 하나가 들어가는 한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촬영 기간 몇 달을 그곳에서 지내며 인물의 삶과 감정에 다가가려 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참아왔던 울분을 공장장에게 터뜨리는 대목이다.
김혜원은 일상에서도 인물의 상황에 다가가려 했던 시간이 역할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공장장에게 울분을 터뜨리는 장면을 떠올리며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자신의 준비 과정을 설명하면서도 실제 그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헤아렸다.
김혜원은 “그 환경에 계신 분들이 들으면 마음이 아프실 수 있어 조심스럽다”고 덧붙였다.
◇ 분장용 배에 무게를 더했던 이유
연극 ‘해뜨기 70분 전’에서는 대리모인 ‘이영서’ 역을 맡았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인물의 몸과 생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고민했다. 김혜원은 임산부 분장용 배를 구입해 안쪽에 무게를 더한 뒤 착용하고 지냈다.
잠을 잘 때도 일상생활을 할 때도 몸의 변화를 느끼려 했다.
“직접 그렇게 생활해보니까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임신한 분들이 겪는 어려움도 생각하게 됐어요.”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인물의 상황에 다가가기 위해 사람들과의 만남도 줄였다.
몰입이 일상으로 이어진 순간도 있었다. 극 중 이영서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귀를 막으며 괴로워한다. 어느 날 식사 중 관리사무소 방송이 들리자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김혜원은 그때 스스로도 놀랐다고 했다.
인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캐릭터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기자가 두 표현을 혼동하자 김혜원은 모두 맞는 말이라고 답했다.
“Love도 맞고 Live도 맞아요. 당연히 그 캐릭터를 너무 사랑하죠.”
특히 이영서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사랑하기도 했지만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촬영장에서는 후배가 사진을 찍어주다가 “언니, 그냥 여기서 사는 사람 같아요”라고 말했다. 김혜원에게는 오래 남는 칭찬이었다.
작품 속 공간에 잠시 들어온 배우가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눈물을 흘린다고 관객이 슬픈 것은 아니에요”
인물을 준비하는 과정은 치열하지만 표현까지 무조건 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김혜원은 관객에게 특정 감정을 느껴달라고 요구하는 듯한 연기를 경계한다.
“제가 대성통곡한다고 해서 관객이 슬픔을 느끼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눈물을 참고 또 참으려는 모습을 볼 때 더 슬플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화를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목소리를 높이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거나 감정을 꾹 누르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물의 분노를 더 잘 전달할 수도 있다.
김혜원은 이처럼 절제되고 농축된 연기를 화장품의 ‘고농축 에센스’에 빗대 설명했다.
“물론 감정을 터뜨려야 할 때도 있지만 절제되고 농축된 표현이 관객에게 더 납득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관객이 그 장면에서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연기가 좋은 연기인 것 같아요.”
◇ 함께 준비한 ‘연애의 숲’…좋은 호흡이 만든 작품
김혜원은 2019년 대한민국 국민대상 방송연기대상과 2020년 양평힐링영화제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두 상은 지난 활동을 돌아보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 계기가 됐다. 특히 양평힐링영화제는 오랫동안 현장에서 활동해 온 선배 배우와 감독들이 직접 심사해 의미가 컸다.
여자연기상을 받은 영화 ‘연애의 숲’은 함께 준비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느낀 작품이다.
촬영 전부터 배우와 스태프가 모여 여러 차례 대본을 읽고 리허설을 했다. 배우들끼리 아이디어도 자유롭게 나눴다.
이렇게 쌓은 준비는 촬영 현장의 호흡으로 이어졌다.
김혜원은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함께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며 “그 덕분에 좋은 호흡으로 작품을 마칠 수 있었고 작품 대상과 연기상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시상식장에서 한 선배 배우가 먼저 다가와 영화를 잘 봤다고 인사한 순간도 아직 잊지 못한다.
수상이 연기를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을 믿고 평가해준 사람들에게 더 깊이 있는 연기로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이 더해졌다.
작품을 함께 만드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해석만 고집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원칙이다.
여러 방향으로 준비해가더라도 현장에서 감독이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 그때마다 연출 의도를 빠르게 이해하고 조율하는 일 역시 배우의 역할이라고 했다.
김혜원은 “배우의 해석과 감독의 연출 방향이 조화롭게 작품에 녹아들어야 한다”며 “다양하게 준비하면서도 현장의 디렉션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려 한다”고 설명했다.
◇ ‘비광’의 엄마, 인물 안에서 찾은 감정
지난달 2일 공개된 영화 ‘비광’에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중학생 아들을 둔 ‘우재 모’ 역을 맡았다.
아들의 잘못을 꾸짖기보다 감싸는 인물이다. 김혜원은 잘못된 방식으로 자식을 보호하는 엄마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다.
영화 ‘루시드 드림’에 이어 두 번째 엄마 역할이었다. 앞선 작품에서 갓난아이의 엄마였다면 이번에는 중학생 아들을 둔 엄마여서 느낌도 달랐다.

작품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이전부터 이지원 감독의 전작 ‘미쓰백’을 여러 차례 봤고 다른 작품의 오디션에서는 자유 연기로 ‘미쓰백’의 ‘주미경’ 역을 준비해 연기하기도 했다.
김혜원은 “존경하는 선배님들, 감독님과 함께하는 작품이어서 출연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며 “오디션에 합격했을 때 큰 기쁨이자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아들이 응급실에 실려가자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의 경험을 떠올렸다. 인물을 분석하는 작업에 자신의 경험 속 감정을 더한 것이다.
김혜원은 “최대한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많이 꺼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 선배들에게 배운 것은 연기만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만난 선배 배우들은 연기를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줬다.
‘비광’ 촬영 당시 김혜원은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배우 류승룡에게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연기하는 것 자체가 즐겁고 재미있다는 말이었다.
오랜 경력과 바쁜 일정 속에서도 연기를 즐기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다. 후배에게 좋은 말과 칭찬을 건네며 챙겨주는 태도에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
영화 ‘압꾸정’에서 만난 배우 오나라는 대본을 읽는 자리에서부터 따뜻한 말을 건넸다. 촬영을 마친 뒤에도 생일 선물을 보내며 후배를 챙겼다.
SBS 드라마 ‘훈남정음’에서 만난 배우 황정음은 처음 보는 후배에게 먼저 밝게 말을 걸고 촬영장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김혜원은 “후배가 긴장할까 봐 분위기를 밝게 해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며 “저도 그런 선배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롤모델로는 배우 최민식과 니콜 키드먼을 꼽았다.
다만 존경하는 마음과 별개로 연기가 시작되면 상대를 작품 속 인물로 바라보려 한다.
자신이 긴장해 역할에서 벗어나면 그 장면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혜원은 “단 한 장면에 출연하더라도 소중한 장면”이라며 “현장에서는 최대한 캐릭터에 집중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 최선을 다해도 선택받지 못했던 시간
배우의 길은 몰입과 보람만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무대와 매체 활동을 병행하며 매일 연기와 발성 연습을 이어갔다. 수없이 프로필을 보내고 오디션을 보고 관계자들을 만났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 이상을 다했다고 느껴도 원하는 만큼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때가 있었다.
연기를 시작한 뒤 가장 어려웠던 점을 묻자 김혜원은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배우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배우는 항상 선택을 받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노력한 것에 비해 기대했던 만큼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 심리적으로 힘들었어요.”
그런 경험이 반복되며 번아웃도 겪었다. 처음에는 힘든 상태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몰랐다. 시간이 흐르며 자신에게 맞는 회복 방법을 찾아갔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들으려 했다.
스스로 이름을 부르며 지금 무엇이 힘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에는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 하기보다 쉬는 것을 허락했다.
햇볕을 받으며 걷고 운동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 좋아하는 요리를 하는 시간도 가졌다.
템플스테이에 참여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도움이 됐다. 김혜원은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말과 강연에서 힘을 얻는다고 했다.
중요한 변화는 비교의 방향이었다.
다른 사람이나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자신과 비교하기보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성장한 점을 돌아보고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려 했다.
김혜원은 “배터리가 방전되면 충전을 하듯 조금이라도 몸과 마음이 충전될 수 있는 방향을 꾸준히 찾고 실행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 혼자 떠난 여행에서 배운 ‘지금, 여기’
힘들었던 시기 혼자 떠난 사이판 여행도 오래 남아 있다.
지인의 권유로 떠난 여행에서 바다와 하늘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잠시 일상과 떨어져 온전히 쉬는 시간을 가졌다.
김혜원은 그곳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고 했다.
“아름답게 지는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바닷속까지 투명하게 비치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이후에도 힘든 날이면 당시 보았던 바다와 하늘, 꽃의 향기를 떠올린다.
그 경험은 좋아하는 문장과도 이어진다.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다.’
해야 할 일과 불안한 미래만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기보다 지금의 삶을 온전히 즐기며 살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김혜원은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도 있다”며 “그래도 마음에 새기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침대 옆에는 ‘지금, 여기’라는 글귀도 붙여뒀다. 템플스테이에서 배운 말이다.
늘 다음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직업의 불안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힘을 쏟고 현재에 집중하려는 다짐이다.
◇ 언어의 장벽 앞에서 시작한 공부
새로운 활동을 위한 준비는 외국어 공부로도 이어졌다.
김혜원은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와 중국어로도 MC 진행이 가능하다.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계기는 2014년 홍콩에서 열린 국제 미인대회였다.
한국 대표로 참가한 대회에서 언어의 장벽을 느꼈다. 친해지고 싶은 참가자가 있어도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중화권에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귀국 후에는 중국어 대본으로 오디션을 준비할 기회도 생겼다. 대회에서 느낀 아쉬움과 오디션 준비가 맞물리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어를 공부하게 됐다.
중국인 교사에게 지도를 받으며 집중적으로 공부한 기간은 약 1년 반에서 2년이었다.
이후 중국어는 MC 진행과 연기 활동에도 활용됐다. 영화 ‘압꾸정’에서는 중국어 동시통역사 역으로,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에서는 중국인 관광객 역으로 출연했다. 드라마 ‘연모’와 영화 ‘묘성인’ 등에서도 중국인 역을 맡았다.
◇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 후배들에게는 울타리로
김혜원은 현재 여성 패션·뷰티 브랜드 ‘미스퀸즈’를 운영하고 있다. 미인대회 준비를 비롯해 모델·연기·MC 교육과 이미지 연출 등을 돕는 곳이다.
배우와 MC 활동, 국내외 미인대회에서 쌓은 경험은 무대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바탕이 됐다. 새로운 무대에 서기 전의 설렘과 긴장, 준비 과정의 어려움을 자신도 겪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쳐온 시행착오를 다른 사람들이 반복하지 않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무대뿐 아니라 인생이라는 런웨이도 멋지게 걸어갈 수 있도록 든든한 조력자가 되고 싶어요.”
새로운 도전에 나선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 그에 맞는 기회가 있으면 알려주거나 추천한다. 자신을 믿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다.
김혜원은 “모든 사람은 각자 가진 고유한 개성과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자신감을 갖고 본인만의 빛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 행수기생부터 기자까지…작품마다 다른 얼굴
김혜원은 최근 드라마 ‘착한 아내는 끝났다’와 ‘그래, 이혼하자’ 등에서도 활동했다.
‘착한 아내는 끝났다’에서는 자신의 이름과 같은 ‘김혜원’ 변호사 역을 맡았다. ‘그래, 이혼하자’에서는 예능 작가를 연기했다.

향후 선보일 작품으로는 ‘무명의 등불’과 ‘넉오프’, 숏폼 드라마 ‘탐정 구해주’를 소개했다.
‘무명의 등불’에서는 행수기생 ‘팔선’ 역을, ‘넉오프’와 ‘탐정 구해주’에서는 각각 기자 역을 맡았다.
같은 직업을 맡은 작품도 있지만 시대와 장르가 다른 만큼 각 인물이 보여주는 모습도 다르다고 설명했다.
‘무명의 등불’에서는 팔선의 입체적인 면모와 서사, 반전을 관전 포인트로 꼽았다. 웹툰 원작 캐릭터를 참고해 머리 모양과 분장도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넉오프’에서는 서울 사투리를 활용했다. 작품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말투와 의상·분장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혜원은 세 작품을 통해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같은 배우인데 이렇게 변신했다고?’ 하면서 재미있게 봐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 아직 해보고 싶은 연기, 멜로와 새로운 얼굴
오랫동안 여러 인물을 연기했지만 해보고 싶은 역할은 여전히 많다.
아직 도전하지 못했지만 꼭 해보고 싶은 장르를 묻자 가장 먼저 멜로를 꼽았다.
“하나를 꼽으라면 멜로요.”
인생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는 작품은 ‘노트북’이다. 영화를 보며 그런 사랑을 연기로 표현할 수 있다면 배우로서 감사한 경험이겠다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멜로 작품에 출연해달라는 팬들의 댓글을 접하고 있다.
심리 스릴러와 액션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내면이 복잡하고 강렬한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사극에는 자신감을 보였고 숏폼 드라마를 통해 다양한 나라의 시청자와도 계속 만나고 싶다고 했다.
새로운 역할을 바라는 마음과 함께 팬들을 향한 고마움도 이야기했다.
브라질의 한 팬은 김혜원의 팬 계정을 만들고 사진을 활용한 소품과 팬아트를 제작해 그 모습을 보내줬다.
김혜원은 관련 사진을 저장해두고 지칠 때마다 다시 본다고 했다. SNS에 남겨진 응원 역시 활동을 이어가는 힘이다.
“온전히 저라는 사람을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해주신다는 것이 정말 감사해요. 보내주신 사랑에 좋은 연기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 첫 무대 전날 들었던 ‘나이테’ 이야기
김혜원에게 연기의 의미를 묻자 컴퓨터에 저장된 폴더 하나를 이야기했다.
‘Acting is my life’.
연기 관련 자료와 이번 인터뷰 준비 내용을 모아둔 폴더다. ‘연기란 곧 나의 삶’이라는 생각이 폴더 이름에도 담겨 있었다.
“연기는 곧 저의 삶인 것 같아요. 아홉 살 꼬마 혜원이가 느꼈던 운명이자 지금까지 걸어오고 있는 삶 그 자체니까요.”
앞으로의 성장을 이야기하며 떠올린 것은 아버지에게 들었던 조언이었다.
첫 연극 공연을 앞둔 전날, 너무 떨린다고 하자 아버지는 나무의 ‘나이테’에 빗대 배우의 성장을 이야기했다.
나무에 나이테가 겹겹이 쌓이듯 배우도 시간과 노력,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나이테를 쌓으며 깊고 단단하게 성장한다는 말이었다. 그 조언은 배우의 길을 걷는 데 힘이 되고 있다.
김혜원은 지금도 좋은 일과 힘든 일을 모두 나이테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그 시간이 쌓이면 더 깊이 있는 연기로 관객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대학생 때 보았던 공연 가운데는 지금도 작품명과 배우의 이름이 함께 떠오르는 무대가 있다.
김혜원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기억으로 남고 싶다.
자신을 못 알아봐도 괜찮다던 배우가 오래 남기고 싶은 것은 작품 속 인물이다.
김혜원이 말하는 ‘빙의’에는 그 바람이 담겨 있다.

“단 한 장면에 등장하더라도 대중의 가슴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고양=양찬희 기자(cx53503@inews24.com),김재환 기자(kjh@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