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증유의 길 들어선 메모리…HBM도 '고객과 설계하는 시대'

미증유의 길 들어선 메모리…HBM도 '고객과 설계하는 시대'

엔비디아, 내부 설계부터 생산공정까지 요구 구체화
삼성, 맞춤형 HBM 확대 속 자체 파운드리 활용 고민
전문가 "현재는 메모리가 주도"…고객 IP와 독자 설계 영역 구분 중요

[아이뉴스24 박지은 기자]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소품종 대량 생산'을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던 데서 고객과 처음부터 함께 설계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4E에서는 고객이 원하는 기능뿐 아니라 생산공정까지 맞추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고객 맞춤형 시장은 새로운 기회지만, 설계 역할을 어디까지 나누느냐가 과제로 떠올랐다. 자체 파운드리를 보유한 삼성전자에는 생산 전략까지 걸린 중대한 문제로 여겨진다.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의 삼성전자 부스에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인 HBM4E(7세대)가 전시돼 있다.[사진=곽영래 기자]

고객과 처음부터 설계…HBM의 '출입구'가 달라진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HBM4E 기반의 엔비디아 맞춤형 제품 'NVHBM'에 TSMC 공정을 일부 활용하는 방향으로 대응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고객 요구에 따른 선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엔비디아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에 NVHBM의 베이스다이를 TSMC 3나노미터 공정으로 생산하도록 요청했다는 것이다.

베이스다이는 여러 층으로 쌓은 D램 맨 아래에서 메모리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연결하는 칩이다. D램이 데이터를 담는 창고라면 베이스다이는 데이터가 오가는 출입구다.

차세대 제품에서는 이 출입구가 데이터 흐름을 관리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엔비디아의 NVHBM은 GPU에 있던 메모리 제어기를 베이스다이로 옮긴다. GPU에는 연산 공간을 더 확보하고 메모리의 데이터 전송 효율은 높이려는 구상이다.

삼성전자의 HBM4E(7세대) 제품. [사진=삼성전자]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는 최근 국회 강연에서 "엔비디아와 설계하는 것, AMD와 설계하는 것, 구글과 설계하는 것이 다 다르다"고 말했다. 고객의 AI 반도체에 따라 메모리 설계도 달라진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과거에는 제품을 만들어 판매했지만 지금은 처음부터 주문을 받고 설계에 들어간다"며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의 경계가 무너진다"고도 했다.

에이직랜드 부스에 전시된 TSMC의 12인치(300㎜) 실리콘 웨이퍼. 웨이퍼는 반도체 회로를 새겨 여러 개의 칩을 만드는 원판이다. [사진=최지호 인턴기자]

메모리 수주해도 생산은 외부로?…삼성·하이닉스의 다른 상황

고객의 참여가 곧 메모리 업체의 설계권 상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윤지원 KAIST 테라랩 박사는 "현재까지는 메모리 측에서 대부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팹리스 회사들에서 요청을 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고객의 제어 기능을 각사의 D램과 연결하고 정상 작동하는지 검증하려면 메모리 업체의 기술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의미다.

다만 고객의 공정 요구가 어디까지 확대될 지가 고민거리로 알려졌다. 엔비디아 외에 AMD와 브로드컴도 TSMC 공정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메모리 주문을 확보해도 베이스다이 생산은 외부에 맡겨야 한다.

삼성전자가 내세우는 메모리 설계·제조부터 파운드리·패키징까지 한꺼번에 제공하는 '턴키' 강점이 사라지는 셈이다.

첨단 로직 파운드리가 없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상황이 다른 지점이다. 양사 모두 자체 설계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지만, 삼성에는 베이스다이를 누가 생산하느냐도 중요한 사업 전략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사진=연합뉴스]

장기적으로는 고객사와 설계 범위를 설정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윤 박사는 고객 맞춤형 개발이 메모리 업체에도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고객사가 베이스다이의 기능 대부분을 직접 설계하면 메모리 업체는 위에 쌓는 코어다이 생산에 집중하는 구조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고객과 협력하되 고객의 설계자산(IP)이 들어갈 영역과 메모리 업체가 설계할 영역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지은 기자(qqji0516@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