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종현 객원 기자] 배우는 평생 몇 사람의 인생을 살아갈까. 한 작품에서 왕이 되었다가 다른 작품에서는 평범한 이웃이 되고, 때로는 자신과 전혀 다른 시대와 환경에서 살아온 인물의 운명을 대신 짊어진다. 그렇게 수많은 삶을 오가면서도 배우가 끝내 마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연기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표현하는 예술이지만, 그 깊이는 결국 배우 자신이 살아온 시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11일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 쿼드에서 열린 '대한민국 배우 명인전–나의 삶, 나의 예술'은 배우의 작품과 경력을 넘어 그 이면에 축적된 삶의 경험과 예술적 고민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이날 무대에 오른 배우 최종환과 김승욱은 오랜 연기 활동을 통해 쌓아온 경험을 관객들과 나누며 배우라는 직업이 지닌 의미를 되짚었다.
최종환은 배우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순간부터 대표적인 배역을 만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냈다.

현재 MBC탤런트극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종환은 1993년 MBC 공채 탤런트로 방송 연기를 시작했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중종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이후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도 같은 역사적 인물을 다시 연기했다. 연기 활동과 함께 학문적 탐구를 이어가며 박사과정을 마쳤고, 후학을 지도하는 교육자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배우 인생을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믿음'과 '준비'다.
최종환이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의외로 평범한 고등학교 국어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교과서를 읽던 그는 단순히 문장을 낭독하는 대신 대사를 하듯 감정을 담아 표현했다. 수업이 끝난 뒤 임병호 선생님은 그를 따로 불러 배우가 되면 잘할 것 같다는 말을 건넸다. 당시 최종환은 자신에게 어떤 연기적 재능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승이 건넨 한마디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는 서울예술대학에 진학했고, 처음에는 배우가 아닌 연출자의 길을 생각했다.
사람을 무대에 세우는 일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 복무 이후 다시 무대에 서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인물을 직접 표현하고 그 삶을 살아가는 순간이 자신에게 더 큰 행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우 최종환의 출발점은 그렇게 자신보다 먼저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해 준 한 사람의 믿음이었다.
이후 대학 시절 뮤지컬 '가스펠'에서 예수 역을 맡았고, 이를 계기로 서울시립가무단에 입단했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월급을 받으며 연기할 수 있었지만, 방송 연기에 대한 열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는 선택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고, 1993년 MBC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며 방송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해야 하는 또 다른 시간이 시작됐다. 여러 작품에 참여하면서도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배역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와 조급함이 공존했다.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 드라마 '여인천하'의 중종이 찾아왔다.
길상을 준비하던 배우가 중종이 되기까지
흥미롭게도 최종환은 처음부터 중종 역을 맡을 예정이 아니었다. 그가 준비하던 인물은 길상이었다. 이미 의상을 맞추고 매일 산을 오르며 역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촬영을 앞두고 감독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길상 대신 중종을 맡아보라는 것이었다. 왕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는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자신보다 훌륭한 배우들도 많은데 왜 자신을 선택했을까. 과연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제작진 내부에서도 캐스팅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감독은 끝까지 최종환을 믿었다.
그는 당시를 돌아보며 자신은 아직 스스로를 충분히 믿지 못했지만, 감독은 먼저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줬다고 회상했다. 그 믿음은 중종이라는 인물을 완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이어졌다.
첫 촬영은 영하의 추위 속에서 진행됐다. 현장에는 여러 대의 살수차가 준비돼 있었다. 왕이니 비를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감독의 해석은 달랐다. 중종은 편안하게 왕위에 오른 인물이 아니라 처절한 과정을 거쳐 왕이 되어야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최종환은 차가운 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촬영에 임했다. 육체적으로 고된 장면이었지만 그에게 오래 남은 것은 추위보다 자신을 믿어준 감독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장면마다 중종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어떤 감정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지,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렇게 한 장면씩 쌓아간 시간이 배우 최종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최종환은 독백을 통해 자신이 중종이라는 인물을 만들어가려고 애쓰는 동안 오히려 그 인물이 자신을 배우로 키워주고 있었다는 생각을 전했다. 배우가 배역을 완성하는 동시에 배역 역시 배우를 성장 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월을 지나 다시 만난 중종…같은 인물, 다른 배우
최종환에게 중종은 한 작품이 끝났다고 해서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다시 중종을 연기했다. 같은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그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다른 작품들을 경험했고, 다양한 사람과 인물을 만났으며,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더 많은 시간을 살아왔다.
젊은 시절의 배우가 인물의 감정과 행동을 이해하는 방식과 오랜 경험을 쌓은 배우가 같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같을 수 없다. 최종환은 같은 배역을 다시 만나는 경험이 특별했다고 회상했다. 어떤 인물은 작품이 끝나도 배우 안에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연기가 단순히 대사를 외우고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인물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와 상황, 인간관계와 선택의 이유를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배우 자신의 경험이 깊어질수록 같은 인물을 해석하는 시선도 달라질 수 있다.
중종은 최종환에게 대표적인 배역이면서 동시에 배우로서 자신의 성장 과정을 돌아보게 하는 인물이 됐다.
MBC탤런트극회 회장으로서 바라보는 배우의 오늘과 내일
배우 최종환의 활동은 작품 속 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현재 MBC탤런트극회 회장으로서 동료 배우들과의 교류와 방송 연기자 공동체의 역할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방송 환경은 그가 1993년 MBC에 입문하던 시절과 크게 달라졌다. 지상파 방송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드라마 제작 환경은 케이블과 OTT, 디지털 플랫폼으로 확장됐으며, 콘텐츠 제작과 유통 방식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은 배우들에게 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기존의 활동 방식과 경력 구조에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중견 · 원로 배우들의 경험을 어떻게 다음 세대와 연결할 것인지, 오랜 연기 경력을 가진 배우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지는 방송·문화예술계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배우에게 연륜은 단순히 나이가 많아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수많은 작품과 인물을 경험하며 축적한 인간에 대한 이해, 감정을 표현하는 깊이, 현장에서의 판단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는 예술적 자산이다. 이러한 자산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배우들 사이의 교류와 협력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MBC탤런트극회와 같은 배우 공동체가 고민할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또한 AI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영상 콘텐츠 제작 환경이 변화하는 시대일수록 배우가 지닌 고유한 가치에 대한 질문도 중요해지고 있다.
기술은 새로운 표현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한 인물의 삶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인간 배우의 경험과 해석이 갖는 의미는 여전히 크다. 최종환이 걸어온 연기 인생 역시 이러한 배우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준비"…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최종환은 배우가 된 이후에도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대학원에 진학했고,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무대와 촬영장에서 쌓은 경험을 학문적 탐구와 연결하고, 다시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은 배우로서의 삶을 확장하는 또 다른 길이 됐다. 그가 학생들에게 자주 강조하는 말은 간결하다. "재능보다 중요한 건 준비다."
배우에게 재능은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그것만으로 긴 연기 인생을 이어갈 수는 없다. 언제 어떤 배역이 찾아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평소 꾸준히 공부하고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경험이 이를 뒷받침한다. 길상을 준비하던 배우에게 갑자기 중종이라는 중요한 역할이 주어졌듯, 배우의 인생에는 예상하지 못한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결국 그동안 쌓아온 노력과 준비에서 나온다.
최종환은 학생들에게 준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 역시 같은 말을 되새긴다고 했다. 지금도 새로운 배역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는 것이다.
배우로서의 경력이 길어질수록 배움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는 자세다. 누군가의 믿음으로 시작된 배우 인생, 이제는 후배들에게 최종환의 삶에서 특별하게 연결되는 두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배우의 길을 권해준 임병호 선생님과, 그에게 중종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긴 감독이다. 두 사람이 건넨 말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최종환 자신이 미처 확신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먼저 발견하고 믿어줬다는 사실이다.
그 믿음은 한 청년이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했고, 이후 중요한 도전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이제 최종환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직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충분히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 도전해 보라고 권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가 성장하는 시간을 함께 지켜봐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단순한 연기 교육을 넘어 예술가가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된다.
배우가 남기는 유산은 작품과 수상 경력만이 아니다. 함께 작업한 동료들에게 전한 신뢰, 후배들에게 건넨 격려, 누군가의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만든 한마디 역시 소중한 유산이 될 수 있다. ‘대한민국 배우 명인전–나의 삶, 나의 예술’에서 최종환이 들려준 이야기는 결국 이 지점으로 모인다. 명인은 단순히 오랜 시간 활동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예술로 승화하고 그 경험을 다음 세대와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때 스승의 한마디를 믿고 배우의 길을 선택했던 청년은 이제 수많은 작품과 인물을 거쳐 후배들에게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는 위치에 섰다. 최종환의 독백은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너는 배우를 하면 잘할 것 같다." 자신의 인생을 바꿨던 그 말을 이제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다는 마음.
배우 최종환에게 연기는 지나온 삶의 기록이면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술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것뿐 아니라 또 다른 배우의 시작을 응원하는 일로 확장되고 있다. 무대는 끝나도 배우의 삶은 계속된다. 최종환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예술'은 바로 그 끝나지 않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이종현 객원 기자(hopeklee@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