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빌릴 기업 없는 '생산적 금융'

[기자수첩] 빌릴 기업 없는 '생산적 금융'

[아이뉴스24 이도훈 기자] “돈을 빌려줄 만한 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근 은행 기업금융 현장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기업의 자금 수요가 줄었다는 뜻은 아니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돈이 절실한 기업은 많다. 문제는 추가로 빚을 내더라도 이자를 감당하고 원금을 갚을 수 있는 기업을 찾기 어렵다는 데 있다.

정부가 생산적 금융을 강조하면서 은행들도 기업대출 확대에 나서고 있다. 가계대출을 늘리기 어려운 은행으로서는 기업금융이 중요한 성장 돌파구다. 하지만 영업 현장의 경쟁은 재무구조가 탄탄한 우량기업에 집중된다. 일부에서는 대출금리를 낮춰 마진을 거의 남기지 않는 경쟁까지 벌어진다. 돈이 필요한 기업과 은행이 돈을 빌려주고 싶은 기업이 다른 셈이다.

지난 9월 5대 은행의 대기업대출은 한 달 새 5조4888억원 늘었다. 중소기업대출 증가액은 2조830억원이었다. 두 부문 증가액의 약 72.5%가 대기업에서 나왔다.

은행을 탓하기만도 어렵다. 생산적 금융을 확대하라는 주문이 상환 능력을 따지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대출이 부실해지면 은행의 건전성이 흔들리고, 다른 기업에 돈을 빌려줄 여력도 줄어든다.

다만 이미 자금 조달이 원활한 기업을 놓고 금리를 낮추는 경쟁이 생산적 금융의 충분한 성과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성장 가능성이 있지만 담보와 실적이 부족해 자금을 구하지 못하는 기업에도 금융의 물꼬를 터주는 것이 생산적 금융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대출도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 쓰이면 생산과 고용을 늘릴 수 있다. 중소기업 대출이라고 모두 생산적인 것도 아니다. 기업 규모만으로 구분할 일이 아니라 자금이 어디에 쓰이고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를 봐야 한다.

그러려면 은행은 기업의 기술력과 사업성, 미래 현금흐름을 평가하는 역량을 높여야 한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은 정책금융과 보증을 통해 나눌 필요가 있다. 건전성을 지키면서도 성장할 기업에 기회를 주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과를 따지는 기준도 대출 잔액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존 우량기업의 대출을 다른 은행에서 가져오는 경쟁도 잔액은 늘릴 수 있다. 정작 봐야 할 것은 자금을 구하지 못하던 기업이 투자를 시작했는지, 새로운 사업에 나설 수 있었는지다.

돈이 얼마나 풀렸느냐보다 어디로 흘러갔느냐가 중요하다. 생산적 금융은 숫자가 아니라 방향이다.

/이도훈 기자(ldh12@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