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윤 기자] 전국 농지전수조사를 계기로 농지 소유와 임대차를 둘러싼 구조적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농협과 지방자치단체, 사회적경제조직 등 공익적 주체가 농지를 매입해 농업인에게 공급하는 새로운 농지정책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정부 재정과 농지은행 중심의 기존 농지정책만으로 급증하는 매도·임대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농협과 지자체 출자·출연기관, 사회적협동조합, 비영리법인 등이 농지를 매입한 뒤 청년농과 임차농 등 실경작자에게 장기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이른바 ‘공익형 농지 소유·임대제’ 도입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송옥주 국회의원(경기도 화성시 갑)은 지난 1월 농협의 공익 목적 농지 소유를 허용하는 내용의 농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데 이어 지자체 출자·출연기관과 소비자생활협동조합, 사회적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비영리법인 등이 참여하는 ‘농지보유합리화법인’ 지정·운영 제도를 담은 추가 농지법 개정안 발의를 추진하고 있다.
현행 농지법은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토대로 농지를 자기 농업경영에 이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법률이 정한 예외에 한해 비농업인의 농지 소유를 인정하고 있다.
송 의원이 추진하는 제도는 이 같은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공익성이 인정되는 기관·법인에 제한적으로 농지 소유를 허용해 농지의 매입과 관리, 임대 기능을 확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농협의 경우 공동영농과 친환경농업, 영농형 태양광 발전사업 등 공익적 영농사업을 목적으로 농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고, 농지보유합리화법인은 매입한 농지를 청년농업인과 후계농업경영인, 귀농인, 공동영농조직 등에 우선 공급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관련 사업비와 이차보전 등을 지원하고 농지관리기금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특히 민간자금을 활용할 경우 제한된 국가 재정으로 농지 매입 효과를 크게 확대할 수 있다는 게 제도 도입을 주장하는 측의 설명이다.
예컨대 농지보유합리화법인의 농지 매입자금 대출에 대해 정부가 연 2% 수준의 이자를 지원하는 구조라면 2조원의 재정 투입을 통해 이론적으로 100조원 규모의 자금에 대한 연간 이자를 지원할 수 있다. 다만 실제 농지 매입 규모는 대출기간과 금리, 자기자본 비율, 상환구조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농지보유합리화법인의 경영이 부실해질 경우에는 농지를 담보로 매입자금을 공급한 농협 등이 해당 농지를 인수·관리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 농지은행만으론 한계…매도·임대 수요 급증
이 같은 논의가 부상한 배경에는 농지전수조사가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올해 추진한 전국 농지전수조사 기본조사에서는 조사 대상 농지 가운데 상당수가 농지법 위반 의심 대상으로 분류됐다.
농식품부가 1996년 1월 1일 이후 취득한 농지 136만㏊를 대상으로 실시한 기본조사에서 전체 조사 대상의 27.0%가 위반 의심 농지로 분류됐다. 유형별로는 불법 임대차 의심 21.1%, 무단 휴경 의심 11.6%, 불법 전용 의심 9.0% 등이었다.
전수조사를 통해 그동안 농촌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졌던 구두계약 중심의 임대차 문제까지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농지를 매도하거나 합법적인 임대차 구조로 전환하려는 수요 역시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이를 기존 농지은행만으로 흡수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농지은행은 매입가격과 대상 농지 등에 일정한 기준이 적용되는 데다 우량농지를 중심으로 매입하고 청년후계농과 2030세대 등에 우선 공급하는 정책적 성격이 강하다.
이에 따라 일반 임차농과 고령농, 시설농업 희망자 등은 농지 수요가 있어도 정책 지원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부가 공공임대용 농지매입 예산을 대폭 확대하고 있지만 전국에서 발생하는 농지 매도·임대 수요를 정부 재정만으로 흡수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전국 농지 실거래가격을 기준으로 위반 의심 농지나 처분 대상 농지를 정부가 직접 매입하려면 수십조원에서 수백조원의 자금이 필요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따라서 정부가 모든 농지를 직접 매입하는 방식보다 농협과 지역 공익법인 등 민간·공공 주체의 자금을 활용해 농지의 매입과 임대를 분산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 “농지는 있는데 농사지을 땅은 없다”
농촌 현장의 임대차 구조 역시 제도 개선 필요성을 키우고 있다.
2025년 기준 전체 농가의 43.5%, 전체 경지면적의 45.0%가 임대차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농지 소유자와 실제 경작자가 다른 구조가 이미 농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전수조사 이후 불법 임대차에 대한 관리가 강화되면서 기존 임대차 관계가 종료될 경우 수년 동안 해당 농지를 경작해 온 임차농이 경작 기반을 잃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친환경농업은 토양 관리와 인증에 장기간이 필요한 만큼 임대차 관계가 갑자기 종료되면 농업인이 수년간 구축한 생산 기반과 인증을 동시에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고령농 역시 농사를 계속하기 어렵지만 농지를 적정 가격에 매각하거나 안정적으로 임대할 상대를 찾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결국 한쪽에서는 농지를 팔거나 빌려주려는 수요가 존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농사를 지을 농지를 구하지 못하는 ‘농지 미스매치’가 발생하는 셈이다.
◇ 농협·사회경제조직이 ‘농지 중간지원조직’ 역할
이에 따라 농협이나 사회경제조직이 농지를 직접 매입한 뒤 실경작자에게 장기 임대하는 ‘농지 중간지원조직’ 모델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농협중앙회 미래전략연구소도 최근 발간한 ‘농지제도 개선과 농협의 대응방안’ 보고서를 통해 국가의 농지 매입·비축만으로 안정적인 농지 보전과 관리에 한계가 있다며 농협이 공익적 목적에 한해 농지를 소유하거나 별도 법인에 출자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지역 사정에 밝은 농협이 고령·은퇴농이 내놓은 농지를 발굴해 매입·관리하고 이를 청년농이나 임차농에게 공급하는 방식이다.
송 의원이 추진하는 농지법 개정도 이러한 방향과 맞닿아 있다.
지난 1월 발의한 개정안은 공동영농과 친환경농업 등 일정한 공익 목적에 한해 농협의 농지 취득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농협의 농지 소유를 무제한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취득한 농지를 법률에서 정한 사업에 일정 기간 이용하지 않을 경우 농지은행 등에 처분하도록 하는 등 투기적 소유를 차단하기 위한 장치를 두는 방식이다.
추가 개정안에서는 이를 농협뿐 아니라 지자체 출자·출연기관과 사회적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비영리법인 등으로 확대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 해외에서도 공익적 농지 보유 모델 운영
해외 사례도 제도 도입 논의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에서는 시민사회나 공익적 조직이 농지를 확보해 농업인에게 공급하거나 공동으로 관리하는 다양한 모델이 운영되고 있다.
일본 역시 농지 중간관리와 이용집적을 위해 공공성이 있는 조직이 농지의 임대·관리 과정에 참여하는 제도를 운영해왔다.
송 의원은 “최근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시민사회가 사회공헌 차원에서 농지를 매입하고 농업인들과 공동경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국내에서도 이런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금기시했던 농협의 농지 소유 문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며 “통제가 어려운 농업회사법인의 농지 소유는 허용하면서 공공성이 강한 농협의 농지 소유를 제한하는 것이 타당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전수조사 이후 농지정책 ‘관리’에서 ‘유통·공급’으로
정부의 농지전수조사는 농지 소유와 이용 실태를 파악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향후 농지정책의 방향을 둘러싼 논의로 확산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올해 농지법 개정을 통해 전수조사의 법적 근거를 강화하고 위반 농지에 대한 처분명령 등 사후관리도 강화했다.
하지만 농지 소유 규제를 강화하는 것만으로 농촌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농지를 처분해야 하는 고령농이나 부재지주에게는 정상적인 매각·임대 통로를 제공하고, 농지를 필요로 하는 청년농과 임차농에게는 안정적인 경작권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송 의원은 “부재지주와 고령농이 농지를 원활하게 처분하고 농업인은 농지를 직접 매입하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며 농협과 사회경제조직 등이 참여하는 ‘공익형 농지 소유·임대제’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국 단위 농지전수조사가 그동안 누적돼 온 불법 임대차와 유휴농지, 부재지주 문제를 드러낸 만큼 향후 농지정책의 핵심은 단속을 넘어 농지를 실제 농업인에게 어떻게 안정적으로 연결할 것인지에 맞춰질 전망이다.
/화성=이윤 기자(uno29@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