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최기철 기자] 한국 정부가 이란 다야니 일가가 1차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금 지급 지연으로 손해를 봤다며 제기한 약 7700억원 규모의 2차 ISDS에서 전부 승소했다. 판정부는 미국의 대이란 제재를 따르기 위한 지급 지연과 국내 법원 명령에 따른 공탁이 한·이란 투자보장협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30일 오전 정부과천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중재판정부가 지난 28일 다야니 일가 6명의 청구를 만장일치로 모두 기각했다고 밝혔다.
다야니 측이 청구한 금액은 5억17만1697유로로, 판정 선고일 환율을 기준으로 약 7700억원이다.
판정부는 다야니 측에 정부가 지출한 소송비용의 75%인 약 40억원과 중재 행정비용 전액인 약 8억원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청구인 6명이 비용을 연대해 부담해야 한다.
다야니 일가는 이란 가전·석유화학 기업 엔텍합의 창업주이자 지배주주 가문이다. 2010년 자회사 D&A를 통해 워크아웃 중이던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를 추진하면서 채권단에 계약보증금 약 578억원을 냈다.
대우일렉트로닉스 채권단은 엔텍합이 투자확약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이듬해 계약을 해지하고 보증금을 몰취했다.
다야니 측은 보증금 몰취가 투자협정 위반이라며 2015년 9월 1차 ISDS를 제기했다. 판정부는 2018년 6월 한국 정부가 약 730억원과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소송을 냈지만 2019년 12월 패소했다. 이자 등을 포함해 정부가 지급해야 할 금액은 약 858억원으로 늘었다.
정부는 미국의 대이란 제재로 외화 지급에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보고 관련 절차를 밟았다. 2022년 1월 승인을 받은 뒤 같은 해 4월 다야니 측에 약 622억원을 지급했다.
나머지 약 236억원은 국내 법원의 압류·추심명령에 따라 그해 12월 공탁했다. 위니아전자가 다야니 측을 상대로 낸 물품대금 청구소송에서 해당 판정금 채권에 대한 압류·추심명령을 받은 데 따른 조치였다.
그러나 다야니 측은 정부가 1차 판정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아 다른 곳에 투자해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실제 지급에 앞선 2021년 10월 2차 ISDS를 제기한 뒤 지급과 공탁이 이뤄진 이후에도 중재를 이어갔다.
이번 사건에서는 판정부의 관할권과 정부의 공정·공평 대우 의무, 투자자의 자유로운 송금을 보장할 의무, 중재판정을 준수할 의무 위반 여부가 쟁점이 됐다.
판정부는 먼저 이번 사건을 심리할 관할권이 있다고 봤다. 1차 판정금은 다야니 측이 몰취당한 계약보증금의 등가물로서 당초 투자의 연장에 해당한다는 판단이다. 1차 판정금은 투자협정상 투자가 아니어서 판정부에 관할권이 없다는 정부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본안에서는 정부가 투자협정을 위반했다는 다야니 측 주장을 모두 배척했다.
판정부는 정부가 OFAC 승인을 받은 것은 미국의 대이란 경제 제재와 국제경제 질서를 고려한 정당한 결정으로, 다야니 측에 대한 차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부가 1차 판정 취소소송을 제기하고 국내 법원의 압류·추심명령에 따라 판정금 일부를 공탁한 것도 자의적이거나 부당한 조치가 아니라고 봤다.
정부가 투자자의 자유로운 송금을 보장할 의무를 위반했다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당 의무는 투자자가 자신의 투자자산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을 정부가 부당하게 막지 못하도록 한 규정일 뿐, 정부가 직접 외화를 송금하는 판정금 지급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판정부는 판정금 지급이 늦어진 것도 미국의 대이란 제재를 준수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불가피한 조치라고 판단했다.
1차 중재판정을 제때 이행하지 않아 별도의 협정 위반이 발생했다는 주장도 기각했다. 판정금을 지급받지 못한 투자자는 집행지 법원에 강제집행을 신청해야 하며, 판정 불이행을 이유로 다시 ISDS를 제기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투자협정의 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봤다.
판정부는 새로운 ISDS 제기가 가능하다고 보더라도 정부가 1차 판정에 따라 원화 지급을 제안한 이상 판정 준수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이번 판정으로 ISDS를 판정금 집행 절차의 우회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를 차단했다고 평가했다. 국내 법원의 압류명령과 정부의 공탁 등 적법한 사법절차 역시 외국인 투자자가 ISDS를 통해 우회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판정 정정·해석·보충 신청이나 다야니 측이 중재지인 런던 법원에 판정 취소소송을 제기할 가능성 등 후속 절차에 대비하는 한편 소송비용 환수에 나설 방침이다.
/최기철 기자(lawch@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