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창재 기자] “이제는 은행이나 병원에서도 까만 글씨 앞에서 작아지지 않고 직접 서류를 작성할 수 있어 기쁩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일이다. 이름을 쓰고, 서류를 읽고, 필요한 내용을 직접 적는 일.

하지만 평생 글자 앞에서 마음부터 작아졌던 현봉금 어르신에게 연필을 들고 자신의 손으로 서류를 작성하는 일은 세상과 다시 마주하는 일이었다.
늦게 시작한 배움이 삶을 바꾸고 있다.
대구지역 늦깎이 학습자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 삶의 이야기가 ‘문해의 달’을 맞아 잔잔한 울림을 전하고 있다.
대구행복진흥원 평생교육진흥원이 마련한 올해 문해의 달 행사에는 대구지역 35개 기관에서 모두 179점의 작품이 접수됐다. 시화 110점, 엽서 69점이다.
지난 16일 대백프라자 프라임홀에서 열린 ‘2026 대구 문해의 달 선포식 및 시화전 시상식’에는 학습자와 가족, 문해교육기관 관계자 등 280여명이 함께했다.
전국 단위 10명과 지역 단위 12명 등 모두 22명이 수상의 기쁨을 안았다.
그러나 이날의 진짜 주인공은 상장보다 배움을 통해 달라진 자신의 삶을 처음으로 자기 글씨로 써 내려간 학습자들이었다.

대구광역시장상을 받은 현봉금 어르신(달성군노인복지관)도 그중 한 명이다.
현 어르신에게 글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읽고 쓰는 능력을 갖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은행이나 병원을 찾아가도 글씨 때문에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의 일을 자신의 손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이제는 은행이나 병원에서도 까만 글씨 앞에서 작아지지 않고 직접 서류를 작성할 수 있어 기쁘다”며 “오늘 직접 쓴 시를 낭독하며 내 일상에 큰 자신감과 뿌듯함이 생겼다”고 말했다.
교육부장관상을 받은 김안건 학습자(질라라비장애인야학)의 사연도 참석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김 학습자는 텔레비전에서만 봤던 ‘꽹이(꽹과리)’를 야학에서 직접 쳐본 경험을 글에 담았다.
화려한 문장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글씨로 표현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김 학습자는 “좋아하는 꽹이 이야기로 시를 써서 큰 상을 받아 참 좋다”며 “상금으로 떡을 해서 야학 식구들과 나누겠다”고 기쁨을 전했다.
그에게 글은 혼자 배우고 끝나는 공부가 아니었다. 배움으로 얻은 기쁨을 다시 사람들과 나누는 통로가 됐다.
성인문해교육의 가치는 ‘몇 글자를 배웠느냐’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은행 서류를 직접 작성하고 병원 안내문을 읽는 것,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사람들 앞에서 직접 쓴 시를 읽는 것까지 배움은 일상의 자립과 자신감을 되찾는 과정이 된다.
대구행복진흥원은 문해교육기관들이 학습자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행정 지원을 이어갈 방침이다.

최희재 대구행복진흥원 원장 직무대행은 “뒤늦게 연필을 쥔 거친 손마디가 만들어낸 글자에는 포기하지 않고 배움을 이뤄낸 위대한 승리가 담겨 있다”며 “어르신들의 소중한 배움이 중단되지 않도록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필요한 지원을 세심히 챙기겠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글씨는 그저 글씨지만, 누군가에게는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다.
평생 늦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다시 연필을 들었다. 삐뚤빼뚤한 글씨 속에는 늦은 배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다시 써 내려가는 늦깎이 학습자들의 새로운 시작이 담겨 있다.
/대구=이창재 기자(lcj123@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