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권서아 기자] 인공지능(AI) 개발 속도를 늦추자는 '감속론'이 확산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에 미칠 영향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17일 반도체업계에서는 아직 이를 AI 인프라 투자 축소나 HBM 수요 둔화 신호로 보기는 이르다는 분위기다. 감속론이 실제 기업과 국가의 행동으로 이어질지부터 불확실하다는 이유에서다.

논쟁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생성형 AI '클로드'를 개발한 미국 AI 기업 앤스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최고경영자(CEO)가 불을 붙였다. 그는 AI 개발을 멈추자는 게 아니라 최첨단 모델의 성능 향상 속도를 낮춰 안전 기술이 따라갈 시간을 벌자고 제안했다.
아모데이 CEO가 우려한 것은 AI가 AI 개발 자체를 가속하는 상황이다. AI가 코딩과 연구를 도와 더 강력한 모델을 만들고, 새 모델이 다시 다음 AI 개발에 투입되면 사람의 검증 속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외부 평가기관이 개발 과정을 상시 점검하고 주요 AI 업체들이 공통 안전기준을 만든 뒤 미국과 중국 등 국가 간 합의로 확대하자는 3단계 구상도 내놨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 일론 머스크도 같은 날 공개적으로 취지에 동조했다.
기업끼리 합의해도…정부가 허용할까
관건은 실제 실행 가능성이다. 기업들이 동시에 개발 속도를 낮추려면 서로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도 미국이 속도를 늦추는 동안 중국이 계속 개발하면 AI 주도권을 내줄 수 있다.
기업 간 공동 감속이 미국 경쟁법의 벽을 넘을지도 변수다. 아모데이 CEO는 AI 기업들이 안전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반독점법상 허용 범위를 넓혀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앤드루 퍼거슨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은 이런 요구를 두고 "매우 의심스럽게 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열린 '올인 서밋' 무대에 있던 젠슨 황 엔비디아 CEO에게 전화해 AI 감속 움직임에 "중국이 관련돼 있을 수도 있다"며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 CEO도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겠다"고 답했다.
황 CEO는 다음 날 미국에서 열린 세일즈포스 연례 행사 '드림포스 2026'에서도 "안전은 공학적 문제"라며 개발 속도와 안전을 양자택일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감속론의 배경을 놓고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시각도 있다. 황 CEO는 앞서 지난 10일 AI 위험론이 사이버보안 산업의 제품 수요를 키우는 데 활용되고 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실제 AI 위험론이 부각된 뒤 사이버보안 관련주는 강세를 보인 반면 엔비디아·AMD 등 AI 반도체주는 하락했다.
AI 업체들이 GPU 구매와 데이터센터 증설 부담을 낮추기 위해 개발 경쟁의 속도를 조절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다만 안전 논의가 실제 빅테크의 설비투자(CAPEX) 축소로 이어졌다는 신호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삼성·SK, LTA 확대…CAPEX 변화가 관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요 고객과 장기공급계약(LTA)을 늘리고 있다는 점도 단기 수요 변동을 줄이는 요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2분기 실적발표 후 컨퍼런스에서 5대 글로벌 데이터센터 고객과 LTA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아마존웹서비스(AWS),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메타, 오라클 등을 해당 고객으로 보고 있다. 전체 메모리 생산능력의 60~70%를 다년 계약으로 가져갈 계획이다.
SK하이닉스도 핵심 전략 고객을 포함한 약 10곳과 LTA를 마무리했다. 구체적인 고객 명단은 공개하지 않았다. 빅테크의 AI 인프라 투자가 늘면서 추가 공급 요청도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고객사가 원하는 메모리 물량을 생산능력만으로 모두 맞추기 어려운 상황도 이어지고 있다. 일부 AI 기업이 개발 속도를 조절하더라도 당장 메모리 수급 흐름을 바꿀 정도는 아니라는 게 업계 판단이다.
빅테크의 실제 투자 규모도 관건이다. 아마존과 MS, 구글, 메타 등이 데이터센터 CAPEX를 줄이는지, 엔비디아와 자체 AI 가속기 생산계획이 낮아지는지가 HBM 수요 변화의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속도 조절 논의만으로 현재의 AI 인프라 투자나 HBM 수요 흐름이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주요 고객사의 생산계획과 데이터센터 증설 추이를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서아 기자(seoahkwon@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