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박지은 기자] 10년 전인 2016년, 삼성전자가 5년간 1조6000억원을 들여 개발한 18나노 D램 공정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갔다.
유출된 공정종합절차서(PRP)는 약 600단계에 이르는 D램 제조 공정과 사용 설비, 조건값 등을 담은 핵심 자료다. 검찰은 삼성전자 출신 연구원이 이 자료를 빼돌렸고,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이를 D램 개발에 활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28년간 근무한 뒤 2016년 CXMT 창립 멤버로 합류한 전직 연구원도 이 기술을 불법 취득·사용하는 데 가담한 혐의로 지난해 기소됐다. 지난 4월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 사이 CXMT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2016년 설립된 CXMT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이어 세계 4위 D램 업체로 성장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세계 D램 시장에서 CXMT의 매출 기준 점유율은 처음으로 10%를 기록했다.
같은 일이 지금 벌어진다면 기술을 빼돌린 사람을 '간첩'으로 처벌할 수 있을까.
지난 13일부터 73년 만에 개정된 간첩죄가 시행됐다. 기존 형법 제98조는 '적국'을 위한 간첩행위를 처벌했다. 북한과 같은 적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위해 기밀을 빼돌린 경우 간첩죄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개정으로 형법 제98조의2 '외국 등을 위한 간첩'이 신설됐다.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의 지령이나 사주, 의사 연락 아래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전달·중개하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 기존 적국 간첩죄는 유지하면서 처벌 범위를 외국 등으로 넓혔다.
하지만 산업 현장에 대입하면 얘기가 조금 복잡해진다.
새 간첩죄가 보호하는 대상은 '국가기밀'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 우리 기업이 보유한 '국가핵심기술'은 조문에 명시돼 있지 않다. 범죄의 상대방도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규정돼 있을 뿐 '외국 기업'은 따로 적혀 있지 않다.
삼성전자가 겪은 18나노 D램 기술 유출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해당 기술은 국가핵심기술이다. 하지만 국가핵심기술이라고 곧바로 형법상 국가기밀이 되는 것은 아니다. CXMT가 중국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새 간첩죄가 자동으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 사건에서는 해당 기술이 국가기밀에 해당하는지, 외국 등의 지령·사주·의사 연락이라는 요건을 충족하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 법을 고쳤지만 산업스파이까지 곧바로 간첩죄로 처벌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닌 셈이다.
중국의 추격 속도를 생각하면 이 문제를 가볍게 볼 수도 없다.
업계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D램과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격차가 분야에 따라 3년 안팎까지 좁혀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CXMT는 최근 상하이 증시 상장에 성공하며 미래를 위한 투자 재원도 마련했다.
지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첨단 D램, 인공지능(AI)용 HBM 등에서 앞서 있지만, 호시탐탐 추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추격의 시간을 줄이는 방법 중 하나가 경쟁사의 기술과 인력을 가져오는 것이다. 공정기술과 노하우를 손에 넣으면 수년간 거쳐야 할 시행착오를 건너뛸 수 있다. 삼성전자가 1조6000억원을 들여 개발한 기술이 CXMT로 넘어간 사건을 단순한 기업 영업비밀 유출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더욱이 한국에서 메모리 반도체는 더욱 각별하다.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에서는 미국과 대만에 주도권을 내줬지만 D램과 HBM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시장을 이끌고 있다.
AI 시대가 열리면서 메모리의 전략적 가치도 더 커졌다. 한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기술 경쟁력 가운데 하나다.
마침 국회에는 현행 간첩죄를 한 번 더 손보자는 법안이 올라와 있다.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지낸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31일 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외국 등을 위한 간첩죄'의 상대방에 외국 기업을 추가하고, 보호 대상도 국가기밀뿐 아니라 국가핵심기술까지 넓히는 내용이다. 법정형도 현행 3년 이상의 징역에서 10년 이상의 징역으로 높이도록 했다. 개정안은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심사 중이다.
물론 정상적인 해외 이직이나 공동 연구, 기술 협력까지 위축되지 않도록 처벌 범위와 요건은 촘촘하게 따져야 한다. 그러나 논의를 미룰 여유도 많지 않다.
중국은 이미 세계 D램 시장 4위까지 올라왔다. 한국이 수년간 돈과 시간을 들여 벌려놓은 기술격차를 누군가 빼돌린 기술로 단숨에 줄여주는 일은 막아야 한다.
73년 만의 간첩죄 개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국가의 경쟁력과 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산업기술을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보호할 것인지 이제 더 구체적인 답을 내놓을 차례다.
/박지은 기자(qqji0516@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