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CEO들 "속도조절" 외치는데…반도체 현장은 "물량 더 달라"

AI CEO들 "속도조절" 외치는데…반도체 현장은 "물량 더 달라"

AI 안전 우려에 삼성·SK하이닉스 등 반도체주 출렁…실제 주문은 반대
메모리업계 장기공급계약 확대…BofA "장기 투자 흐름에선 노이즈"

[아이뉴스24 박지은 기자] 인공지능(AI) 개발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주장이 글로벌 AI 업계에서 확산하면서 반도체 시장에도 긴장감이 번지고 있다. AI 개발 속도가 느려지면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반도체 수요도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하지만 실제 반도체 공급망에서 감지되는 분위기는 다르다. 메모리업계에서는 주문 축소나 투자 지연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고객사들이 수년 뒤 필요한 물량까지 장기공급계약(LTA)으로 확보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 D램 이미지 [사진=삼성전자]

14일 업계에 따르면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은 최근에도 AI 관련 고객사들로부터 공급 물량을 늘려달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한 메모리업계 관계자는 "현장에서는 오히려 물량을 더 달라는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며 "현재까지 AI 수요를 조절하거나 주문을 줄이겠다는 시그널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논란은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CEO)가 AI 개발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공개하면서 불붙었다. 최첨단 AI 모델의 능력이 빠르게 발전하는 만큼 안전장치를 마련할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 일론 머스크 xAI CEO도 아모데이의 제안에 지지를 나타냈다.

주식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이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4.1%, 6.4% 하락했고 TSMC도 1.2% 떨어졌다. AI 개발 속도조절이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투자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번졌다.

앤트로픽. [사진=REUTERS/연합뉴스]

수년 뒤 메모리까지 선점…LTA 경쟁은 확대

실제 메모리 시장의 움직임은 '속도조절'과 거리가 있다는 반응이다. 공급 부족이 이어지자 고객사들은 당장 필요한 물량을 넘어 수년 뒤 사용할 메모리까지 계약으로 묶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2분기 실적발표에서 전체 메모리 생산능력의 60~70%를 LTA 물량으로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5대 데이터센터 고객과 계약을 마쳤으며 AI 관련 대형 고객 5곳과 추가 협상도 진행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핵심 고객사를 포함한 약 10곳과 LTA를 체결했다. 회사는 중장기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요 고객사와 추가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도 장기계약을 크게 늘렸다. 마이크론은 16건의 전략적 고객계약(SCA)을 맺었으며 이 가운데 14건에서 계약기간 동안 약 1000억달러의 최소 매출을 확보했다. 계약은 2030년까지 이어진다.

낸드플래시 업체 샌디스크도 장기계약을 확대하고 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샌디스크는 새로운 장기계약을 통해 2027 회계연도 공급 비트의 약 절반, 2028 회계연도의 약 3분의 2를 이미 고객사와 묶었다. 일부 계약기간은 4년 이상이다.

AI 개발 속도를 늦추자는 논의가 시작된 시점에도 반도체 고객사들은 반대로 향후 필요한 메모리를 장기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왼쪽)와 SK하이닉스.[사진=연합뉴스]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대만 타오위안 사업장. [사진=마이크론테크놀로지]

공급망도 아직 부족…BofA "단기 노이즈"

AI 반도체 수요가 당장 꺾였다는 신호는 메모리 이외의 공급망에서도 뚜렷하지 않다.

광파증권(GF Securities)은 최근 공급망 조사와 반도체 전시회 현장 점검을 토대로 웨이퍼 팹과 첨단 패키징, 메모리, 기판 등 AI 인프라 공급망에서 빠듯한 수급이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AI 기업 CEO들이 최첨단 모델의 개발 속도 조절을 언급하고 있지만 AI 모델의 규모를 키우는 스케일링과 추론 수요는 계속되고 있다는 판단이다.

AI 모델의 개발 속도와 AI를 구동하는 데 필요한 반도체 수요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최첨단 모델을 만드는 속도가 느려지더라도 이미 개발된 AI의 사용량이 증가하면 추론에 필요한 컴퓨팅 자원은 더 필요하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도 최근 AI 업계의 논란을 장기적인 AI 투자 흐름을 바꿀 변수로 보지 않았다.

BofA는 아모데이 CEO의 속도조절 요구를 비롯한 최근 프론티어 AI 연구소의 논란을 장기적인 AI 설비투자(Capex) 추세와 비교하면 단기적인 '노이즈'라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AFP/연합뉴스]

기업도 국가도 경쟁 중…'누가 먼저 멈추나'

AI 개발 속도를 실제로 늦추기 어려운 이유도 있다. 한 기업만 먼저 속도를 줄이면 경쟁사에 뒤처질 수 있고 미국만 속도를 늦추면 중국에 추격할 시간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BofA는 이를 '죄수의 딜레마'에 빗댔다. 업계 전체로는 개발 속도를 조절하는 것을 선호할 수 있지만 경쟁사가 계속 기술을 개발하는 상황에서 개별 기업이 먼저 속도를 늦추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미·중 AI 경쟁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아모데이 CEO는 AI 개발 속도를 조절하는 동시에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중국 AI 연구소의 모델 증류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반발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아모데이 CEO의 제안을 중국의 AI 발전을 억제하고 미국의 기술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냉전식 접근'이라고 비판했다. 중국 외교부는 AI를 둘러싼 적대적 경쟁 대신 국제 협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AI 개발 속도를 늦추자는 주장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AI 위험에 대한 우려가 과장됐다는 취지로 말하며 미국이 중국보다 앞선 AI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지은 기자(qqji0516@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