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창재 기자]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를 읽으며 오래 마음에 남은 글이 있다. 삶의 과정에서 ‘목표와 목적’이 뒤섞여 방향을 잃을 때마다 꺼내 읽었던 글이다. 그런데 요즘은 유난히 그 문장이 크게 다가온다.
퇴계 이황이 후학 고봉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무릇 군자는 나아감과 물러남에 구차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의를 잊고 벼슬만 좇아서도 안 된다 하였습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정치와 공직을 바라보는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직에는 나아갈 때가 있고 물러날 때도 있어야 한다. 벼슬을 얻었다고 그것이 자신의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퇴계는 또 당부한다.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니고 담금질해 발뒤꿈치를 땅에 단단히 붙여 허명과 이익과 위세에 넘어가지 않길 바랍니다.”
450여 년 전 한 선비가 후학에게 보낸 편지다. 그런데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들려주어도 조금도 낡지 않았다.
요즘 장관 후보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청문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사회와 정치권을 달구고 있다.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용혜인 후보자는 장관에 임명되더라도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혀 논란이 되고 있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 역시 과거 음주운전과 식약처 청탁 논란 등 여러 행적을 둘러싸고 검증의 도마에 올랐다.
청문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낙마를 말할 생각은 없다. 후보자에게는 소명할 권리가 있고 국민에게는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다. 의혹은 검증하고 사실은 사실대로 판단하면 된다. 그러나 이번 일을 보면서 묻고 싶은 것은 후보자 개인의 흠결만이 아니다.
우리 정치에는 과연 나아감과 물러남의 원칙이 있는가.
우리 정치만큼 나아갈 줄은 알면서 물러날 줄 모르는 곳도 드물다.
자리에 들어갈 때는 명분이 넘친다. 지명자가 적임자이고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결격 사유로 내려놓아야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사정이 생기고, 이유가 생기고, 핑계가 생긴다. 들어갈 때는 명분이고 나가야 할 때 붙잡고 있는 건 핑계다.
비록 임명권이 주어진 권리지만 공직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장관도 국회의원도 국민이 잠시 맡긴 자리다. 그러므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내가 그 자리에 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이다. 정치가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듯하다. 정치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국가도 정부도 국회도 정당도 특정 정치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내가 물러나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나은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할 줄 아는 정치인이 얼마나 되는가.
더 답답한 것은 원칙의 잣대다.
남에게 요구할 때는 그렇게 엄격했던 원칙이 자신에게 돌아오면 갑자기 사정이 달라진다. 남의 잘못에는 법과 원칙을 말하면서 자신의 과거에는 실수와 사정을 말한다. 내가 하면 사정이고 남이 하면 원칙인가.
국민이 정치인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잘못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잘못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골라 한다면 그것은 실수의 문제가 아니다. 염치의 문제다.
장관은 정치적 명예를 얻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을 책임지는 자리다. 법과 원칙을 집행하고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그런 자리를 자신의 정치적 자산처럼 생각한다면 이미 공직자의 의미를 잊은 것이다.
퇴계는 고봉에게 ‘허명과 이익과 위세에 넘어가지 말라’고 했다.
오늘의 정치인들이 가장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권력은 사람을 시험한다. 자리가 높아지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주변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국민을 위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위해 국민을 설득하는 사람이 된다.
그때부터 물러날 때를 잃는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방송과 언론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드러내려는 정치인을 보면 안쓰럽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인이라면 이제는 자신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남기고 한 걸음 물러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이번 청문회가 후보자의 과거를 들추고 여야가 공방이나 벌이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후보자가 공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권력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자신의 욕망보다 공직의 책임을 앞세울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후보자 자신에게도 묻고 싶다. 왜 내가 그 자리에 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국민을 위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자리를 얻는 것보다 물러나는 것이 오히려 정치인으로서 더 큰 선택일 수 있다.
퇴계의 편지는 450여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 우리 정치에 와 있다. “나아감과 물러남에 구차함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정치인은 영원히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때가 되면 물러나야 하는 사람이다. 자리를 차지하는 능력보다 자리를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가 더 큰 정치적 자산이다. 들어갈 때는 명분을 찾고, 물러날 때는 핑계를 찾는 정치. 그것이 반복될수록 국민이 보는 것은 정치인의 능력이 아니라 뻔뻔함이다.
정치를 하려거든 자리를 탐하기 전에 내가 설 자리인가를 생각하라. 나아감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물러남에는 염치가 필요하다.
/대구=이창재 기자(lcj123@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