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기의 문화인사이트]‘역적’우범선의 아들 우장춘, 1950년대 대한민국 식량난 해결사로 나선 이유는?

[서병기의 문화인사이트]‘역적’우범선의 아들 우장춘, 1950년대 대한민국 식량난 해결사로 나선 이유는?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

[아이뉴스24 서병기 기자] 지난 23일 방송된 KBS 1TV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 광복절 기획 2부 ‘경계인 우장춘의 선택’(연출 한석구)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기획이었다.

KBS 1TV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의 ‘경계인 우장춘의 선택’편 [사진=KBS]

일본에서 태어나 50여년간 일본에서 살았던 우장춘은 해방 직후인 1950년 식량난에 직면한 한국으로 건너와 세계적인 식물 유전학자, 육종학자로서 한국인을 위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일본군에 포섭돼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에 가담한 ‘대한제국의 역적’ 우범선이다.

따라서 우장춘을 논하기 전에 그의 아버지부터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범선은 1881년(고종 18)에 일본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진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에 참여했다가, 을미사변 때는 1895년 제2차 갑오 개혁 당시 일본의 건의로 창설된 조선 훈련대의 제2 대대장이었다.

을미사변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 공사관과 경성 수비대, 낭인, 조선군 훈련대의 합작품으로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했다.

이미 미우라 고로의 전임 공사인 이노우에 가오루 시절에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을 경계한 러시아 제국의 개입을 막고 조선을 친일내각으로 다시 개편하기 위함이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 히로부미보다 다섯살이나 많지만 그 밑에서 충실히 일할 수 있는 ‘절친’이다. 제 1차 이토 내각에서는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조선 공사를 할 레벨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토와의 긴밀한 커넥션 때문에 이를 수락했다. 그러니까 주 조선 일본 공사라는 직책으로도 엄청난 일을 꾸밀 수 있는 실세였다.

이노우에는 조슈번(아마구치현)의 번교인 명륜관에서 수학하며 인근 쇼카 손주쿠에서 배우던 이토와 만났다. 둘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런던대 전신)으로 함께 유학갔다가 고향인 조슈 정벌 소식을 접하고 함께 귀국했다.

외국의 군인들이 타국의 황후를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워버리는 행위는 말도 안되는 짓이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수치스럽고 비극적이다. 이 사건의 명목상의 주모자는 역시 조슈번 출생의 미우라 고로였지만, 그 배후의 지휘자는 이노우에 가오루이고, 더 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이들은 친일군대인 조선군 훈련대를 포섭했다. 쿠데타를 성공시키려면 왕을 지키는 문지기, 내금위, 청와대와 수도의 경비를 맡는 수경사 간부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하고자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보낸 후 자진하게 했다.

그런데 계유정란 공신 책봉 명단을 보면, 가장 많은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내금위 소속이다. 김종서는 수양의 부하에게 철퇴를 맞고도 처음에는 죽지 않고 단종을 만나러 궁 내부로 가려고 했지만, 4대문이 모두 닫혀있어 단종에게 이 사실을 알려 대책을 논의해보지도 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내금위는 왕의 호위와 궁궐을 지키며, 특히 왕이 사는 궁의 문을 책임지는 군대다. 이후부터는 수양대군 페이스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 군인들이 경복궁으로 칼을 차고 들어와 명성황후를 쉽게 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조선군 훈련대 등 친일군인 덕분이다. 일본인들은 명성황후 얼굴도 몰랐다. 하지만 우범선이 대대장으로 있는 조선군 훈련대의 도움으로 경복궁의 문은 무장한 이들 일본군인들에게 너무나 쉽게 열리고 말았다.

우범선은 이들에게 명성황후 살해 및 시신소각까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니 대한제국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일본으로 망명했고, 고종은 을미사변 관련자들인 친일군인들의 체포령과 참수령까지 내렸다. 결국 우범선은 개화파 지식인이자 전 만민 공동회 회장으로 일본에 자객으로 파견된 고영근에게 살해됐다.

우장춘은 아버지 우범선이 일본 망명시절에 만나 결혼한 일본인 여성 사카이 나카에게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다.

우장춘은 5살 때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일본에서 고아원과 희운사라는 절에 맡겨지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 개화파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학비를 지원받아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후 농사시험장에 근무하며 21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승진이 되지 않는 등 조선인 차별을 몸소 느껴야 했다.

우범선(왼쪽)과 가족. 가운데가 어린 우장춘. [사진=KBS]

우장춘은 일본제국대학에서 임호식(홋카이도제국대학)에 이어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농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우장춘은 1935년 취득한 박사학위논문인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을 통해 ‘종의 합성’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다윈의 진화론을 다시 쓰게 만들 정도로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른 종을 교배시켜 새로운 종을 만든다는 건 진화를 통해 자연선택된다는 이론과는 완전히 달랐다. 우장춘의 논문은 일본언론으로부터 “진화론의 신개척”이라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우창춘은 이렇게 도쿄제국대학에서 우수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제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에서도 상술했듯이, 대한민국은 해방이 된 후 경상남도 농무국장인 김종이 우장춘을 다시 만나, 해방된 한국이 우장춘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당시 한국은 쌀가격이 폭등했으며, 물량이 절대 부족했다. 그러니 종자, 농업 문제에서 우장춘을 메시아로 여겼을 것이다.

김종은 조선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1934년 일본에서 우장춘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우장춘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육종계의 거장이 된 과정을 기사로 쓴 바 있다.

우장춘은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한국행을 선택했다. 특히 경음이 있는 ‘쌀’ 발음을 어려워했다고 했다. 일본인 아내와 자녀들을 일본에 남겨둔 채 홀로 한국에 왔다. 1950년 부산항에 도착한 우장춘은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나라를 위해 살았지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 것이며, 이 땅에 뼈를 묻겠다”고 말했다. 우장춘의 딸은 인터뷰에서 “아버지(우장춘)는 속죄하기 위해 한국에 갔다고 엄마한테 들었다”고 밝혔다.

당시 한국의 여론은 우장춘이 명성황후 시해 참가범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장춘의 한국행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이 많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특히 앞장 서 우장춘 환국 계획을 서둘렀다.

초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에 임명된 우장춘은 ‘우장춘환국위원회’에서 제공한 정착금도 연구장비와 종자를 마련하는데 썼다.

당시 우장춘을 만나 작물육종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한상기(93) 전 서울대 농대 교수는 “그 양반은 소박한 작업복에 항상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었지”라고 회상했다.

우장춘이 한국에 오고 몇 달 뒤 한국전쟁이 터졌지만 부산에 있는 원예시험장에서 우수 종자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는 우리 땅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다. 한국전쟁의 격변 속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포탄 모양으로 결구를 이루는 김장용 결구배추 ‘원예 1호’를 시작으로 감귤, 감자 등 다양한 품종 개발이 이어졌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속이 꽉 차고 맛있는 배추김치와 무의 품종개량도 우장춘 박사 덕분이다. 감귤과 유채꽃을 제주에 보급한 일, 가을에 코스모스가 길가에 피어 김상희가 부른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이라는 노래 가사가 나오게 된 것 모두 우장춘의 보급 활동 결과다. 일본 교수가 개발한 ‘씨 없는 수박’을 한국에 가져와 재배한 것도 우장춘이다.

마침내 1955년 대한민국은 종자 자급자족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장춘이 시작한 품종 개발과 육종 연구는 후학들에게 이어졌고 오늘날 대한민국은 1만 4천 개가 넘는 신품종을 출원하는 세계 8위의 ‘종자선진국’이 되었다.

우장춘은 종자를 국산화하고, 종자 전문인력을 양성했다. 농업을 근대화하려면 기술력 향상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장춘의 제자로 함께 일한 육종가 최정학 박사는 채소 육종 뿐 아니라 멜론을 국산화하고 그것을 일본 아오모리 등의 도시에서 재배해 일본 대도시에 판매하는 사업을 지금도 하고 있다. ‘우리 종자는 우리 힘으로 만든다’는 게 스승 우장춘의 철학이었다고 한다.

우장춘은 1953년 8월 모친이 사망했는데도, 일본에 가지 못하고 원예시험장에서 시신 없는 장례를 치렀다. 한국정부가 그를 일본에 보내주지 않은 것은 다시 한국으로 못 돌아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우장춘의 딸이 말했다.

이때 들어온 조의금으로 우물을 팠다. 우물의 이름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라는 뜻을 담은 ‘자유천’(慈乳泉)이다. 현재도 그 우물은 부산시 동래구 온천2동 우장춘 기념관 야외 마당에 있다.

우장춘은 한국에서 9년 5개월 살다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국산종자를 개발하지 않았을까? 우장춘이 없었다면 제자인 최정학 D육종연구소장은 “(박사님이) 안왔으면 (우리가 먹는 건) 거의 일본 종자야”라면서 “그만큼 큰 일을 했고 위대한 분이지”라고 말했다.

우장춘이 죽기 직전인 59년 8월 대한민국은 국무회의를 열어 우장춘에게 대한제국 문화포장 수여를 결정했다. 건국후 두 번째 수여였다. 농림부 장관이 서울시 을지로 중앙의료원에 입원해있던 우장춘을 직접 찾아 훈장을 걸어주었다. 우장춘은 “드디어 조국이 나를 인정했구나”라고 감격하듯 말했다.

우장춘은 농촌진흥청이 있는 수원에 안장됐다. 최초의 사회장이었다. 우장춘은 짧은 시간동안 한국 농업의 현실을 마주했고, 신품종을 개발하며 국내 육종 연구의 기틀을 닦았다. 농림부 장관 자리도 거절하고, 철저하게 현장을 지킨 육종학자였다.

김근배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초빙교수는 “저는 우장춘이 왜 한국에 가게 됐는가 했을 때, 과학 휴머니즘이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유전육종의 거장인 '경계인' 우장춘은 ‘역적’ 우범선의 아들이지만, 식량난에 직면한 1950년대 한국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해 우직한 과학자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품종들을 개발해내는 성과를 올렸다.

/서병기 기자(wp@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