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윤 기자] 한동안 잊힌 줄 알았던 과거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 거리에는 90년대 감성을 담은 음악이 흐르고, 영화관에는 복고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패션과 광고, 예능 프로그램까지 ‘레트로’라는 이름의 과거 소환에 열광하는 분위기다. 단순한 유행이라 보기에는 열기가 심상치 않다. 사람들은 왜 다시 과거로 향하는 것일까
흥미로운 점은 같은 레트로 열풍이라도 한국과 일본이 그리워하는 시대가 다르다는 점이다.
일본은 여전히 ‘버블경제 시대’에 머물러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경제 호황기는 일본 사회가 가장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던 시절이었다. 네온사인으로 물든 도심, 고급 소비문화,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은 일본인들에게 ‘잃어버린 황금기’로 남아 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시티팝 음악과 버블 감성을 담은 콘텐츠가 꾸준히 재조명된다.
결국 일본의 버블 향수는 단순한 음악 취향이나 문화 소비가 아니다.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집단적 기억에 가깝다.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장기 침체를 겪으며 가장 빛났던 시간을 반복적으로 꺼내 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반면 한국이 다시 꺼내든 시대는 ‘90년대 X세대’다. IMF 외환위기 이전, 지금의 40-50대가 청춘을 보냈던 시절이다. 자유분방함과 개성이 살아 있었고, 디지털이 지배하기 전 사람 냄새 나는 관계가 존재했던 시대다. 삐삐, 공중전화, 카세트테이프, CD, 비디오 대여점, 오락실, 나이트클럽, 거리 문화까지 지금은 사라진 풍경들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최근 국내 개봉을 앞둔 영화 와일드씽(Wild Thing)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거칠지만 솔직했던 90년대 청춘의 분위기, 반항과 자유, 인간관계의 온기를 담아낸 콘텐츠는 X세대에게는 추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오히려 신선한 감성으로 다가간다. 낡았지만 새롭고, 불편했지만 인간적이었던 시절의 감성이 재해석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레트로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히 “옛날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지금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의 무게가 자리 잡고 있다.
청년들은 취업난과 집값, 불안정한 미래 속에서 “열심히 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박탈감을 느낀다. 중장년층은 은퇴와 생계, 자녀 교육비 부담 속에서 삶의 무게를 견뎌낸다. 자영업자는 경기 침체와 소비 위축으로 하루하루 버티기에 급급하다. 사회 전체가 경쟁과 속도에 내몰리면서 사람들은 어느새 ‘여유’와 ‘정’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가장 따뜻했던 시절을 찾는다.
90년대는 완벽했던 시대가 아니었다. 불편했고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으며 정보도 느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처럼 모든 것이 숫자와 알고리즘으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고 공중전화 앞에서 동전을 챙겼으며 서툴지만 사람 간 관계에는 온기가 있었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도 존재했다.
결국 오늘날 국민들이 열광하는 레트로는 ‘과거’ 자체가 아니다. 그 시절 느꼈던 자유, 희망, 낭만, 그리고 사람 냄새 나는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즐거움도 모두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 속에서 국민들은 잠시라도 자신의 청춘과 감정을 복원하고 싶어 한다. 레트로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각박한 현실을 견디기 위한 감정의 피난처이자 집단적 위로가 되고 있는 셈이다.
2026년 대한민국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천천히 흐르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현실이 팍팍할수록 90년대는 더 따뜻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영화와 음악,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고 있다.
어쩌면 지금 국민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의 유행이 아니라 그 시절 마음속에 남아 있던 ‘희망’인지도 모른다.
/평택=이윤 기자(uno29@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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