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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기의 문화인사이트]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해낸 가장 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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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뉴스24 서병기 기자] 5월 1일 현재 1천675만여 관객을 모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가장 큰 역할은 국민 마음속에 삼촌인 수양에게 왕위를 찬달 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단종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확실하고 강하게 심어넣어줬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정당하지 못한 방법과 수단으로 왕이 된 세조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인식도 함께.

단종은 이전부터도 민중들에게 동정을 받았다. 10세에 조선 6대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왕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16세때 죽었다는 사실은 불쌍하다 못해 비통하다. 장항준 감독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엄홍도(유해진)를 역사속에서 불러냈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사진=온다웍스]

단종은 조선에서 가장 ‘로열 블러드’가 짙은 인물이다. 왕조국가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왕의 자격은 없다. 태어나니, 할아버지가 세종대왕이다. 아버지 문종은 세종의 장남이다. 단종은 문종의 장남이다. 단종은 원손-왕세손-왕세자를 거쳐 즉위한 조선 유일의 군주다.

김성수 감독도 12.12 반란군 간부들이 쿠데타에 성공했다며 찍은 기념사진이 영화 연출의 큰 계기가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전두환 일당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동영상도 나오는데, 이런 게 잘못됐다는 인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압에 실패하는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을 통해 심어주었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1453년 10월 10일 벌어진 수양의 쿠데타, ‘계유정난’이었다. 조선 역사상 가장 폭풍 같았던 하룻밤이 지난달 26일 KBS 1TV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 단종과 수양 2부작 1부 ‘누가 수양의 쿠데타를 도왔나’에서 영상으로 구현됐다.

수양대군은 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을까? 수양은 학문과 무예가 뛰어났지만, 왕의 8촌 이내 친족은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종친불사(宗親不仕)' 원칙에 따라 벼슬 길이 막혀있었다. 왕족들 사이에 생길지도 모르는 권력다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수양의 첫 번째 목표는 좌의정 김종서였다. 조선시대는 최고의 행정기관 의정부에서 인사 문제를 의결할 때 직책마다 3명의 후보를 추천(삼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중에서, 미리 의정부 대신들이 논의해서 한 명씩 표시(황표정사 黃票政事)한다. 그러니까 왕은 표시된 인사를 낙점만 하면 된다. 특히 어린 단종이 인사 문제를 어떻게 알겠는가? 김종서가 인사를 좌지우지할 수밖에 없었다. 인사 문제는 주로 이조(吏曹)가 담당하지만, 이렇게 되면 의정부에 권력이 집중된다.

수양은 시종 한 명만 데리고 김종서 집에 가 서찰을 보여주고 김종서가 읽는 사이, 수양대군의 종인 임어을운으로부터 철퇴를 맞았다. 돈의문 밖에 살았던 김종서는 여기서 죽지 않고, 단종을 만나기 위해 문안으로 가려고 했지만, 4대문과 4소문을 모두 봉쇄해버리며 한양도성을 장악한 수양대군 때문에 실패했다.

수양대군은 내금위 출신 장군들을 대거 포섭했다. 쿠데타를 착착 준비한 것이다. 내금위는 조선시대 임금을 호위하던 최정예 친위대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처나, 수도경비사령부 같은 조직이다. 정난공신 명단을 보면 홍달손, 유수, 양정 등 무관 중 절반 이상이 내금위 출신이었다.

왜 왕의 최정예 부대인 ‘내금위’가 단종 왕을 지키지 않고 수양의 편에 섰을까? 이즈음 수양은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내금위 군사들이 선발기준에 비해 처우가 약하니, 이들의 처우를 개선해달라는 내용이다. 내금위 군인들의 불만과 빈 틈을 수양대군이 제 때 이용한 것.

수양대군은 책사 한명회와 내금위 무관들로 계유정란뿐만 아니라 2년후 수양의 세조 즉위, 또 2년후 단종 사사 등 엄청난 일들을 단행할 수 있었다. 왕(단종)을 지켜야 될 군인이 왕을 지키지 않고 어린 왕의 삼촌을 지킨다면 상황은 무서워진다.

12.12 쿠데타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의 봄’에서도 수도권 방위와 청와대 외곽을 지키라는 수도경비사령부 간부들이 쿠데타군들의 거사를 도우고 있었다. 수경사령관은 자신의 직속 부하였던 30경비단장과 33경비단장, 헌병단 단장 등 세 명의 직속부하가 모두 하나회 소속으로, 직속상관도 아닌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단종의 죽음을 짧은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1일) 과연 이 기록은 사실이었을지를 오는 3일 방송되는 KBS1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단종과 수양 2부 - 단종, 죽은 왕을 위한 파반느에서 알아본다.

역사에서 사라지는 듯했던 단종이 다시 호명되기 시작한 것은 사후 241년이 지난 숙종 재위기였다. 숙종이 사육신을 복권하고 단종을 복위했기 때문이다. 이후 영조와 정조도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명예 회복 조치를 이어 나간다. 단종이 왕으로서 권위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조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숙종은 세조가 사육신에 대해 “당세에는 난신이나 후세에는 충신”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주장한다. (숙종실록 23권, 숙종 17년 12월 6일)

단종이 복원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단종 후손이 아닌 세조 후손이 왕위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자을산군인 성종만 해도 세조가 할아버지, 연산군과 중종은 세조가 증조할아버지다. 단종과 사육신 복원은 곧 자기 할아버지의 부정을 의미한다. 늦어도 세조 후손들이 단종과 사육신을 되살려낸 이유는 무엇일지 이번 방송에서 살펴본다.

역사는 단종을 잊으려고 했지만, 조선의 민중들은 어린 왕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민간에서는 단종이 죽고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믿음이 퍼져갔다. 단종은 태백산 산신이 되었고, 그가 다녀갔다는 길목마다 서낭당이 세워졌다. 애도와 기억은 시간마저 뛰어넘었다.

1967년부터 영월에서는 단종문화제가 성대하게 열리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시민이 단종의 넋이 서린 영월 땅을 찾으며, 단종 추모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왜 우리는 단종을 이토록 기억하고 있을지 본 방송에서 공개된다.

/서병기 기자(wp@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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