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말 현재, 글로벌 ESG 공시 규제는 긴 혼란을 끝내고 최종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과 공급망실사지침(CSDDD)은 치열한 논의 끝에 적용 대상 기업의 범위를 줄이고, 의무 공시 요건을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최종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국내 역시 한국회계기준원의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가 이러한 글로벌 기조를 반영해 현실적 수준에서 국내 공시 기준을 마련하고, 적용대상과 시기를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박혜수 책임컨설턴트(법무법인 화우 ESG센터). [사진=법무법인 화우]](https://image.inews24.com/v1/cf00986f015fed.jpg)
규제의 역설: 기준이 낮아질수록 깊어지는 ‘회색 공시’의 늪
규제의 불확실성이 해소되고 요건이 완화되었으니 기업들의 부담은 줄어들었을까? 단기적으로는 그렇다. 시장의 관점에서는 예상치 못한 딜레마, 즉 ‘규제의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
법적 의무가 축소되고 문턱이 낮아지자, 기업들은 공시의 목표를 보수적 ‘최소 요건 충족’으로 하향 평준화하고 있다. 많은 기업이 규제가 요구하는 축소된 의무 조항에만 맞춰 천편일률적인 공시를 하게 되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수백 개 기업 중 누가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갖췄는지, 누구의 리스크 관리 전략이 실질적인지 가려내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
결국 공시 대상과 요건이 축소되었다고 해서, 기업이 규제가 요구하는 ‘낮아진 커트라인’에만 안주한다면 시장에서의 차별화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규제의 문턱이 낮아진 이 시점에, 우리 기업은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가? 단순히 축소된 의무를 이행하는 차원을 넘어, 규제와 무관하게 실재(實在)하는 비즈니스 리스크를 통제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확실한 ‘알파(Alpha·초과 수익)’의 단서를 제공하는 세 가지 전략적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규제 요건을 ‘천장’이 아닌 ‘바닥(Floor)’으로 활용하라.
첫 번째 방법은 규제 요건 충족을 ‘목표’가 아닌 ‘출발점’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단순히 탄소 배출량 수치와 감축 목표를 보고하는 것은 이제 누구나 하는 ‘기본’이다.
경쟁력 있는 기업은 그 수치 이면에 있는 ‘How(방법론)’와 ‘Capability(역량)’을 통해 자신만의 차별성을 입증한다. 예를 들어, 한 화학 기업이 규제상 요구되는 배출량 데이터를 공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위에 이 기업만이 보유한 저탄소 공정 특허 기술, 협력사 탄소 데이터까지 실시간으로 수집하는 독자적 디지털 플랫폼의 효율성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단순히 “규제를 잘 지키고 있다”는 보고를 넘어 “탄소 규제가 강화될수록 우리의 원가 경쟁력과 기술 진입장벽은 오히려 높아진다”는 강력한 투자 메시지가 된다.
규제가 요구하는 정량 데이터 위에 기업 고유의 기술적 서사를 입혀야 한다.
둘째, 비재무 성과의 ‘재무적 연결고리’를 정교하게 입증하라.
두 번째는 규제가 명시적으로 강제하지 않는 영역에서 ‘비용 효율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현재 IFRS S1, S2 등은 기후 리스크의 재무적 영향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인권·노동·지배구조 영역은 정성적 서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 지점이 차별화의 기회다.
예를 들어 “공급망 인권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 고위험 협력사를 선제적으로 관리한 결과, 협력사 파업으로 인한 부품 공급 중단 일수가 전년 대비 50% 감소했으며, 이를 통해 공급망 안정화 비용을 약 30억 원 절감했다”는 식의 구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규제 대응이 아니라, 회계적으로 검증 가능한 수준의 ‘경영 효율성’ 지표가 되며, 리스크가 비용으로 전이되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셋째, 우리만의 ‘킬러 콘텐츠’로 리스크 통제력을 강조하라.
마지막으로, 천편일률적인 ‘나열식 공시’에서 탈피해 업(業)의 본질적 리스크에 집중해야 한다. 규제 범위가 축소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장의 관심이 정말 중요한 ‘핵심 기업’과 ‘핵심 이슈’에 쏠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IT 기업에게 ‘종이 사용량 감축’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데이터 보안’과 ‘AI 윤리’다. 업계 평균을 초과하는 수준의 보안 시스템 투자 현황, AI 알고리즘의 편향성을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내부 통제 프로세스를 상세히 공개한다면, 이는 단순한 리스크 관리가 아니라 해당 기업의 기술적 신뢰도로 직결된다.
모든 항목을 적당히 잘하는 ‘모범생’보다, 자신의 업(業)에 치명적 리스크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전문가’의 공시가 시장의 선택을 받는다.
정부 역시 이러한 글로벌 완화 기조에 발맞춰 향후 KSSB의 최종 공시 기준을 확정하고, 의무화의 타임라인을 공식화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다.
시장의 눈높이 또한 당분간은 이러한 규제 완화 흐름에 동조하여 다소 느슨해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직시해야 할 냉정한 현실은, 규제의 강도가 낮아진다고 해서 기후 재난으로 인한 공장 가동 중단 위협이나, 자원 고갈로 인한 원가 상승 압력 등의 실질적 리스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규제라는 외부의 강제성이 약화된 지금이야말로, 타의가 아닌 자의로 비즈니스의 체질을 개선하고 리스크 관리 역량을 내재화할 수 있는 진짜 기회다.
국내 기업들은 이 시점에서 ‘대응’이 아닌 ‘본질’을 고민해야 한다. 낮아진 규제 기준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규제 여부와 무관하게 급변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기업의 ‘본원적 경쟁력’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비재무적 요소를 재무적 성과로 연결하는 능력은 이제 단순한 규제 준수의 수단을 넘어,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기업 가치를 결정짓는 진정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
박혜수 책임컨설턴트(법무법인 화우 ESG센터) hsoop@yoon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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