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균성 기자] 소설가 정지아는 빨치산의 딸이다. 그도, 그의 부모도 태어난 땅을 벗어나서 산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태어나자마자 디아스포라(Diaspora)의 운명이었다.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타국에서 고립되는 삶의 설움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되는 설움을 굳이 비교하자면 후자가 더 약할 리 없다. 스물다섯에 처음 쓴 장편 ‘빨치산의 딸’로 시작된 정지아 문학의 본산은 그 디아스포라다.
35년 전에 출간된 ‘빨치산의 딸’을 읽은 사람은 드물다. 그 세계관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던 사람 중의 일부다. ‘빨치산의 딸’을 모르기에 정지아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문재인 전 대통령 때문이다. 2022년에 출간된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문 전 대통령의 추천 도서였다. 그 덕에 한국인이지만 한국에서 섬처럼 살아야 했던 존재들의 현실이 조금 더 잘 알려졌다.
!['노 웨이 아웃' 조진웅 캐릭터 스틸. [사진=STUDIO X+U, 트윈필름]](https://image.inews24.com/v1/b1503c508c7b1c.jpg)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인기를 끌면서 과거에 쓴 책도 재조명됐다. 2008년에 단편소설 11편을 묶어 펴낸 ‘봄빛’도 그중 하나다. 16년 만인 202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봄빛’에 실린 11편 중 ‘소멸’과 ‘스물셋, 마흔셋’이라는 두 편의 단편소설에서 같은 삽화가 반복되는 게 특히 눈에 띈다. 짧은 분량의 두 소설에서 같은 삽화를 반복 사용했다는 것은, 이 장면이 정지아의 화두였다는 의미일 테다.
정지아는 젊은 시절 빨치산이었던 부모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런 힘도 없는 민초(民草)가 “세상을 바꾸겠다”며 자신과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수렁에 빠트리는 일이 어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런데도 정지아가 20대를 살았던 시대는 또다시 그의 부모가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바꾸겠다”는 젊은이로 들끓었다.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을 흠모하는.
‘아리랑,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은 미국 여기자 님 웨일즈가 중국에서 활동한 김산(본명 장지락)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이다. 김산은 30대 초반에 동지들의 손에 총살당했다. 그 좌절이 어떠했겠나. 그런 김산이 말했다. “세상 모든 것에 실패했지만, 단 하나 자신을 극복하는 데는 성공했다.” 정지아에겐 이 말이, 자신의 삶을 수렁에 빠뜨린 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열쇠 말이 된 듯하다.
‘소멸’에서는 화자가 남자 친구와 대화하던 중에 김산의 이 말을 떠올린다. 남자 친구가 꿈꾸는 희망은 화자가 보기에 불가능한 가능성일 뿐이었다. ‘스물셋, 마흔셋’에서는 화자의 남편이 여행 중인 화자에게 이 말을 인용하며 자신도 그런 삶을 살겠다는 편지를 보내온다. 소설 속 화자나 화자 남편의 입을 통해 이 말을 거듭 전하지만 소설가 정지아는 그들이 그 말을 지켜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이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김산을 흠모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그처럼 살 수는 없다. 정지아의 고민은 항상 그 지점에 머물러 있다. 예수를 흠모하지만 예수가 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렇지만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 아련하고 애잔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 애잔한 삶에 대한 찬가일 것이다.
배우 조진웅 때문에 시끄럽다. 소년 시절 나쁜 행동이 수십 년 만에 드러난 탓이다. 누구라도 그 행동을 좋다고 말하지 않을 거다. 그런데 그를 변호하는 사람도 적잖다. 법을 전공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국무조정실 산하 검찰개혁추진단 박찬운 자문위원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 인간의 전 생애를 소년 시절 기록 한 줄로 재단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폭력”이라며 사회의 비정함에 분노했다.
이 건을 길게 논할 형편은 아니다. 다만 이 일을 지켜보며 정지아의 소설과 그의 화두가 떠올랐을 뿐이다.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을 극복하는 게 더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정지아는 한때 빨치산이었단 이유로 세상과 격리된 부모가 어떻게 다시 세상과 섞여 살아내는지를 보며 깨우침을 얻었다. 끝내 해방된 존재. 긴 세월 조진웅의 반성과 변화는 영원히 돌을 맞아야 할 정도로 무의미한가.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