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최상국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국가연구개발(R&D) 예산 전면 재검토' 지시가 과학기술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과학기술계 일각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R&D 예산 재검토 지시가 단지 긴축재정을 위한 내년 예산삭감에 그치지 않고 정부의 R&D 예산편성절차 전반을 재검토하는 수순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에서 부활한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의 해체까지도 거론되는 양상이다.
과학기술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윤 대통령이 법에서 정한 R&D 예산편성 시한을 넘기면서까지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고 과학기술계의 '카르텔' 타파까지 거론한 것은 단순히 예산삭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R&D 예산 재검토를 지시한 다음날 과기 1차관에 조성경 과학기술비서관을 전격 임명한 것도 이같은 관측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28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의 보고에 대해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9일 차관 내정자들에게는 “약탈적인 이권 카르텔을 발견하면 과감하게 맞서 싸워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7월 4일 열린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회의에서도 '이권 카르텔 타파'를 언급하며 "과학기술 혁신을 가로막는 정부 R&D 나눠먹기 등 기득권 세력의 부당 이득을 제로 베이스에서 검토해 낱낱이 걷어낼 방침"이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5일 서울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제1회 세계 한인 과학기술인 대회'에서도 이어졌다. 세계 한인 과학기술인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우리 정부 R&D 예산이 올해 30조원을 넘어섰다. R&D 투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에 투입돼야 한다"며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뜻을 거듭 밝혔다.
과학기술계는 대통령이 과학기술 연구개발 예산에 대해 '카르텔'이라는 혐의를 씌우면서까지 'R&D 예산 재검토'를 연일 거론하는 것에 대해 매우 당혹해 하는 모습이다.
한 과학기술계 인사는 "과기정통부가 '주요 R&D' 예산을 6월말에 기재부에 넘긴 이후에도 정부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8월말까지 지속적으로 협의·조정해 온 것이 관행이었는데 굳이 법정시한을 넘기면서까지 '제로베이스 재검토'를 지시한 것은 이례적"이라며 "더구나 연구비리나 성과부진 질책을 넘어 시장담합을 의미하는 '카르텔'이라는 용어를 과학계에 덧씌운 것이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실과 재정당국이 지속적으로 '건전재정' 기조를 강조하면서 지출구조조정과 선택과 집중을 요구했는데도 과기정통부가 올해보다 1조원이나 늘린 예산안을 제출한 것이 결국 화근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과기부가 늘 하던대로 '나라살림이 어려워도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는 늘려야 한다'고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지적이다.
상황이 이처럼 흘러가면서 불똥은 정부 R&D 예산을 총괄하는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의 향방에까지 번지는 모양새다.
'과학기술혁신본부'라는 이름의 정부조직은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돼 이명박 정부에서 폐지됐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 부활한 이력 때문에 민주당 계열 정부조직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과학기술혁신본부 제도는 과학기술정책은 과학기술 전문가에게 맡긴다는 철학에 따라 과학기술연구개발 분야의 예비타당성조사와 예산배분조정 기능을 기재부에서 과기부로 이관한 것이 핵심이다.
이에 따라 이번 'R&D 예산 전면 재검토' 사태를 두고 '기재부가 과기부에 넘겨준 R&D예산권을 다시 회수하려는 시도'라는 해석까지 나온다. "R&D 예산을 과기부에 줬더니 과기부와 과기계가 카르텔을 형성해 예산을 나눠먹고 있다"는 프레임을 짜고 있다는 시각이다.
한 관계자는 "교육부가 KAIST 등 과학기술원 예산을 고등교육특별회계로 이관하려다 과기부의 반대로 무산됐던 지난해 말부터 이같은 사태가 예견됐다"며 국정기조에 적응하지 못하고 안일하게 대응한 과기정통부의 '정무적 무능함'을 질타하기도 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과학기술혁신본부, 나아가 과기정통부를 해체하는 등의 정부조직개편까지도 다시 거론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며 "하드웨어 개편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혁신본부가 맡고 있는 R&D 예산편성권은 다시 기재부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당장은 예산 재검토 지시에 따라 내년 예산을 삭감하게 된 과기부 산하 연구기관들이 문제다. 또 깎은 예산의 절반을 국제협력연구에 배정하라는 지침에 따라 급조된 국제공동연구과제들에 대한 퍼주기 우려도 크다. 조성경 과기 1차관은 취임 이틀째 기자들을 만나 "예산을 깎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은 이미 정부 지시에 따라 내년도 예산 20% 삭감안을 제출한 뒤였다.
공개적인 반발 목소리도 이미 나오고 있다. 공공연구노조는 5일 '국가R&D 망치는 대통령의 독단, 위법하고 졸속적인 연구비 구조 조정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내며 반발했다. 노조는 "객관적 진단과 분석 없이 독단적 결정으로 연구현장이 대혼란에 빠졌다"며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던 대선 공약과 정반대 행보"라고 비판했다.
/최상국 기자(skcho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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