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사태가 1년이 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러시아에 진출한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난감해 하고 있다. 인텔, TSMC, AMD, 엔비디아, 애플, 델, HP, 레노버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잇따라 러시아 사업 철수를 선언했지만, 국내 기업들은 눈치만 보며 누적되는 피해만 묵묵히 견디는 모양새다. 삼성·LG 등이 머뭇거리는 사이 중국 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도 뼈 아프다.
24일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삼성 스마트폰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0% 수준이다. 지난해 4월까지만 하더라도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26%로 1위였지만, 지금은 중국 업체가 꿰찼다. 러시아 현지 매체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출하량 기준 1위는 33%를 차지한 중국 샤오미다.
TV 시장에서의 점유율도 바닥을 쳤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월까지 TV 시장 점유율 1위 사업자였으나 큰 폭으로 점유율이 줄었고, 2위였던 LG전자의 러시아 TV 시장 점유율도 지난해 1분기 21.6%에서 올해 절반 이상 감소했다. LG전자는 세탁기, 냉장고 등 주요 가전 분야에서도 1위였지만 현재 판매가 거의 중단됐다.
이는 삼성전자, LG전자가 전쟁 이후 러시아 현지법인의 생산공장 가동과 판매를 전면 중단한 영향이 컸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월 모스크바 인근 칼루가에 TV·모니터 공장 가동을 멈췄고, LG전자는 같은 해 8월 모스크바 외곽에 위치한 루자 지역에 가전 및 TV 생산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공장 재가동 여부는 두 업체 모두 현재까지 정해진 것이 없다.
이에 따라 두 업체의 러시아 시장 내 매출 타격은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러시아법인 매출은 2019년 2천717억6천만 루블(약 4조7천231억원), 2020년 3천70억2천200만 루블(약 5조3천360억원), 전쟁 직전 해인 2021년 3천610억2천만 루블(약 6조2천745억원)을 기록하는 등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매출이 거의 없다.
LG전자 역시 러시아 매출이 줄었다. 지난 2021년 3분기 LG전자의 러시아 등 매출액은 1조3천885억원이었으나,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1조759억원으로 22.5% 감소했다.
전쟁 장기화 영향으로 두 업체의 전체 실적 부담도 늘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생활가전 부문의 매출이 감소했고, 재고자산은 사상 처음으로 50조원대를 돌파했다. LG전자의 생활가전을 담당하는 H&A 사업본부도 지난해 영업이익이 48.9% 줄었다. TV를 맡는 HE사업본부의 영업이익은 99.5% 급감했다. 재고자산 규모도 지난해 3분기 11조2천71억원까지 치솟았다가 4분기에 9조3천888억원으로 다소 줄었다.
업계 관계자는 "현지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이 공장을 가동시키지 않은 상황에서 생산 인력은 대부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매출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수 백 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인건비와 관리·유지비 등은 계속 빠져나가면서 전체 수익성에 상당한 악영향을 주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전자업체들이 종전되더라도 재진입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현지 법인을 운영하며 아직 버티려는 분위기"라며 "전략물자관리원에 수출 재개를 위한 절차를 확인하고 종전만 되면 즉시 시행할 수 있도록 대기 중이지만 전쟁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속 태우는 듯 하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전자업체에게 러시아 생산시설은 현지 매출을 위한 것도 있지만 인근 독립국가연합(CIS) 등으로 향하는 제품도 만드는 곳이기 때문에 중요도가 높다"며 "수 십년 동안 공을 들여 러시아 국민브랜드로 자리매김한 삼성·LG로선 '철수'라는 선택지가 없다고 보여진다"고 밝혔다.
이 같은 상황에 국내 업체들의 자리는 중국 기업들이 차지했다.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중립' 기조를 유지하는 듯 하지만, 대러 무기 지원 의혹을 받고 있는 데다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중국 기업들도 미국, 유럽 기업들이 러시아와의 사업적 관계를 단절하고 있는 것과 달리 상대적으로 침묵을 유지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다.
특히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해 있는 샤오미·리얼미·아너 등 중국 기업의 점유율 합계는 현재 3분의 2에 달한다.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샤오미, 리얼미 등을 합친 것보다 삼성전자의 점유율이 높았다. 삼성전자의 지난 2021년 10월 말 기준 현지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34.5%, 샤오미는 28.1%였지만, 지난해에는 샤오미가 33%로 1위, 삼성전자는 0%로 추락했다.
러시아의 중국산 생활가전·반도체 등의 수입도 크게 늘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해 3~9월 중국의 대러 반도체 수출은 5억 달러로 2021년 전체(2억 달러)보다 많다.
최근에는 중국, 러시아 기업들이 삼성전자, LG전자가 운영하고 있는 현지 공장을 인수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현지 매체 코메르산트에 따르면 중국 가전업체인 하이센스와 러시아 주방업체 쿠퍼스버그, 가전업체 샤우브 로렌즈가 러시아에서 제품 생산을 중단한 LG전자와 삼성전자, 독일 보쉬의 생산 시설 인수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전자업계뿐 아니라 자동차업계 타격도 크다. 현대차그룹은 현지 공장 가동을 1년 가까이 멈추며 어려움을 겪자 최근 정리해고에 나섰다. 러시아 서부지역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현대차 생산법인은 오는 27일까지 현지 직원을 대상으로 정리해고를 실시한다. 이곳은 직원 2천500여 명이 근무했으나, 지난해 10월 가동 중단 이후 90%에 달하는 직원들이 휴직 상태로 전환됐던 상태다.
현대차가 주춤한 사이 중국 자동차 업체들은 러시아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지난해 1~11월 기준 중국 자동차 브랜드인 하발, 지리, 체리의 시장 점유율은 31%에 달한다. 중국 완성차 업체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2020년 3%, 2021년 6% 에 불과했으나, 전쟁 후 현대차를 비롯한 글로벌 제조사들이 떠나자 빈자리를 모두 차지했다.
전쟁으로 수출이 불가능해지면서 우리나라의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와의 교역 규모도 급격히 감소했다. 지난해 러시아 수출액은 약 63억3천만 달러로 전년보다 36.6% 급감했다. 우크라이나 수출액은 같은 기간 동안 62.7% 감소한 약 2억2천만 달러에 그쳤다. 업계에선 지난 1년간 국내 주요 기업들의 러시아 시장 매출 손실 규모만 10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업계 관계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가장 수혜를 입은 곳은 중국 기업"이라며 "전쟁과 이에 따른 제재가 길어질수록 러시아에서 국내 업체들이 설 자리는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국내 기업들이 기약 없는 현지 경제·산업 정상화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지만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며 "러시아가 내수뿐 아니라 독립국가연합(CIS), 동유럽 등 인근 국가의 생산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 기업들이 버티고 있는데 정부에서도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함께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유미 기자(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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