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⑳ 2G CDMA "가보자 vs 안된다"…해결사 등판 [김문기의 아이씨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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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편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첫발인 한국전기통신공사(KT), 한국데이터통신(LGU+), 한국이동통신서비스(SKT)가 설립된 지 꼬박 4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이동통신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해 슬로우 무버에서 패스트 팔로우로, 다시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도약했습니다. 5G 시대 정보통신 주도권 싸움은 더 격렬해졌고, 다시 도전에 나서야할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부족하지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동통신 연대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담긴 독자의 제보도 받습니다 [편집자주]

1992년 12월 3일 체신부가 CDMA 기술을 이동통신 단일 표준화 기술로 발표하기는 했으나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사진은 광고의 한 장면 [사진=SKT]
1992년 12월 3일 체신부가 CDMA 기술을 이동통신 단일 표준화 기술로 발표하기는 했으나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사진은 광고의 한 장면 [사진=SKT]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1992년 12월 3일 체신부가 CDMA 기술을 이동통신 단일 표준화 기술로 발표하기는 했으나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첨단 기술이기는 하나 상용화 시기와 가능성이 불확실한 CDMA와 비교적 상용화 시기를 앞에 두고 있기는 하나 기술적으로는 밀리는 TDMA에 대한 각자의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993년 초 체신부와 상공자원부의 갈등을 꼽을 수 있다. 이 둘 사이의 갈등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1992년 초에도 1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체신부는 민간 경쟁을 서둘러 기술역량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상공자원부는 자체적인 기술력이 먼저 뒷받침돼야 국산장비 경쟁이 가능하다며 제2이통사 선정을 연기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번에는 상공자원부가 CDMA가 아닌 TDMA로 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체신부 심기가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업계에서는 1차 제2이통사 선정이 불발된 이유로 상공부의 연기 주장을 꼽기도 했다. 상공부의 견제로 실제 제2이통사 선정 과정이 일정 부분 연기되기도 했는데, 이 연기가 우연치 않게 차기 대통령 선거일과 더 가깝게 됐고, 특혜 시비를 더 키우는 모양새가 됐다.

물론 각자가 가진 명분은 있었다. 체신부는 기술 관점에서 상공자원부는 통상 관점에서 해석했다. 통신분야는 장치산업으로 초기 인프라 구축이 절대적이기에 처음부터 첨단의 기술이 도입되는 것이 유리하다. CDMA를 선택한 주요 요소기도 하다. 하지만 상공부는 TDMA는 미국과 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 도입이 확정돼 상용화가 멀지 않았기에 수출 산업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셈이다.

하지만 체신부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만약 CDMA 상용화가 실제 이뤄진다면 선진국보다 빠르게, 또는 비슷하게 기술을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이같은 성과가 수출산업화에 더 유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ETRI와 퀄컴의 협력으로 CDMA 테스트가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는 것 역시 자신감을 갖는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실제로 체신부는 같은해 2월 대전에서 ETRI와 퀄컴이 공동개발한 CDMA 이동통신시스템의 예비 성능 시험에 성공하고 당초 7월로 예정된 서울지역 성능시험을 4월에 마무리했다. 이로서 상용화 계획 역시 1997년에서 1995년으로 앞당겨졌다. 또한 미국 팩텔과 US웨스트가 CDMA를 채택한데 이어 GTE, 나이넥스, 벨사우스아메리텍 등도 CDMA로 기울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체신부의 선택에 힘을 더하게 됐다.

체신부는 같은해 5월 CDMA를 포함한 1조 규모의 ‘무선통신 기술개발 10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2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 CDMA 채택을 조건으로 부여하면서 논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 정부-업계 ‘불협화음’…’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 해결사 등판

체신부의 CDMA 기술 표준 확정 과정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업계가 들썩였다.

발단은 1997년 예정된 상용화 시기를 1995년으로 앞당기면서부터다. 당시 체신부는 ETRI와 함께 1993년 9월 시제품을 제작하고 정확히 1년 후인 1994년 9월 1차 상용제품을 개발해 1995년말에는 선정된 제2이동통신사로 하여금 상용화 서비스를 내도록 하는 로드맵을 세워놓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장비를 개발하고 제작해 납품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이었다. 이 시기를 맞출 수 없는 실정이라는 것. 때문에 업계 사정을 무시한 탁상행정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게다가 CDMA 장비는 퀄컴에 기술 로열티를 지급해야 했는데, 이 마저도 부담이 상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일정을 맞추는 것도 어려운데 투자비용까지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되는 구조였다. 만약 이같은 악순환이 지속된다면 결국 외산장비를 들여올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순탄한 CDMA 상용화를 위해서는 정부가 이리지러 얽혀 있는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우선 ETRI는 퀄컴의 창립자인 어윈 제이콥스 회장을 초청했다. 1993년 8월 내한한 제이콥스 회장은 19일 한국 기자들과 만나 예정대로 1995년 상용화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말하는 한편, 기술료 수준 역시 모토로라 등 다른 국가 기업들과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 밝혔다.

또한 ETRI를 중심으로 정부 주도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던 CDMA 사업을 민간과 연결하기 위한 고리를 만드는데 주력했다. 보다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사업 추진이 필요했기 때문. 이 결과 이동통신개발관리사업단을 신설하기로 했다. 사업단은 전전자교환기 국산화를 이끌어 탁월한 성과를 거둔 서정욱 단장에게 맡겼다.

서정욱 단장의 각오는 대단했다. CDMA 기술방식을 선택한 것은 훌륭한 일이나 기존 일가견이 있는 유선장비 연구개발과는 달리 이동통신 기술 개발에 대한 여러움은 상당했다. 국내서는 아날로그 이동통신 원천기술조차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목표는 연구개발을 넘어 상용화 서비스까지 이어질 수 있는 길을 닦는데 있었다.

마침내 1993년 9월 16일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은 한국이동통신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 이마빌딩에 자리잡고 현판식을 개최하면서 정식으로 발족했다. CDMA뿐만 아니라 개인휴대통신(PCN)까지 개발 사업을 전담케 했다. 전파통신기술개발사업에 대한 체신부 장관 자문기구 ‘전파통신기술개발추진협의회’도 이날 발족했다. 의장은 서정욱 단장이 겸임했다.

◆ '국가' 주도 연구소 공동개발 → '민간' 주도 자율경쟁 전환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우선 정부 주도의 국책사업으로 진행하기 보다는 민간을 끌어들여 자율경쟁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끊겨 있던 연결고리를 이어붙임과 동시에 기술개발도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 때 사업단에서 아이디어가 나왔다. 당시 미국 이동통신 시장에서의 경험이 있었던 이성재 부장의 제안으로 1988년 미국 이동통신사업자협회가 디지털 이동전화 도입시 ‘사용자 요구사항’을 제시한 점에 주목했다.

즉, 정부는 CDMA 시스템 개발에 대한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기업은 이 기준에 부합하는 제품을 제작해 업계 상관없이 채택한다는 의도였다. 예를 들어 정부가 특정 크기와 특정 무게, 특정 성능 등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에 맞춰 제작이 이뤄진다면 성능검증을 통해 수주하는 방식이다.

이미 CDMA 로드맵이 계획과 달리 지연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민간 자율경쟁으로 만회하고자 한 셈이다. 시제품은 당초 계획한 1993년 9월에서 1994년 9월로, 1차 상용 시제품은 1994년 9월에서 1995년 3월로 미뤄진 상태였다. 상용화 시기만 1995년말로 맞춰진 그대로였다.

우선적으로 기준부터 세워야 했다. 사업단은 머리를 맞대 ‘CDMA 사용자 요구사항’을 같은해 12월 24일 ETRI뿐만 아니라 LG정보통신, 삼성전자, 현대전자 등 장비개발업체에 통보했다.

연구소 주도의 공동개발에서 업체간 자율경쟁 개발로의 전환이 기반인 이 요구사항의 목적은 분명했다. 아날로그 시장에서 개발 경험이 있는 삼성전자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한편, 독자개발을 선언한 LG정보통신을 돕고, 개발에 어려움을 겪는 현대전자를 지원하는 전략이었다. ETRI는 주문형반도체(ASIC)칩을 개발한다는 임무가 부여됐다.

한편, CDMA 기술방식은 미국에서도 특허 시비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같은해 3월 인터디지털이 퀄컴을 상대로 미국 필라델피아 연방지방법원에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한 것이 발단이다. 인터디지털은 퀄컴의 CDMA 기술이 자신들의 3가지 특허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퀄컴은 미국 샌디에이고 연방지방법원에 미국 통신산업협회(TIA)가 발표한 CDMA표준에 의한 시스템이기에 인터디지털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냈다.

다행스럽게도 같은해 9월 퀄컴이 제기한 소송은 인터디지털과 장점적인 합의에 도달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필라델피아에 제기한 소송은 그대로 남아 있어 향후 특허권 시비 불씨는 남겨놓은 상태였다.

해를 넘긴 1994년 3월 시끄러웠던 2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이 마무리됐다. 한국이동통신은 선경그룹으로, 제2이통사는 포철과 코오롱 등이 함께하는 ‘신세기통신’이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직후인 3월 약속된대로 CDMA 시제품의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목차

1편. 삐삐·카폰 이동통신을 깨우다

① '삐삐' 무선호출기(上)…청약 가입했던 시절

② '삐삐' 무선호출기(中)…‘삐삐인생' 그래도 좋다

③ '삐삐' 무선호출기(下)…’012 vs 015’ 경합과 몰락

④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上)…"나, 이런 사람이야!"

⑤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下)…’쌍안테나' 역사 속으로

2편. 1세대 통신(1G)

⑥ 삼통사 비긴즈

⑦ 삼통사 경쟁의 서막

⑧ 이동전화 첫 상용화, ‘호돌이’의 추억

➈ 이동통신 100만 가입자 시대 열렸다

⑩ 100년 통신독점 깨지다…'한국통신 vs 데이콤’

3편. 제2이동통신사 大戰

⑪ 제2이통사 大戰 발발…시련의 연속 체신부

⑫ 제2이통사 경쟁율 6:1…겨울부터 뜨거웠다

⑭ ‘선경·포철·코오롱’ 각축전…제2이통사 확정

⑮ 제2이통사 7일만에 ‘불발’…정치, 경제를 압도했다

⑯ 2차 제2이통사 선정 발표…판 흔든 정부·춤추는 기업

⑰ 최종현 선경회장 뚝심 통했다…’제1이통사’ 민간 탄생

⑱ 신세기통신 출범…1·2 이통사 민간 ‘경합’

4편.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⑲ ‘라붐’ 속 한 장면…2G CDMA 첫 항해 시작

/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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