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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1세대 통신(1G)…삼통사 비긴즈 [김문기의 아이씨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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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1G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첫발인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설립된 지 꼬박 40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이동통신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해 슬로우 무버에서 패스트 팔로우로, 다시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도약했습니다. 5G 시대 정보통신 주도권 싸움은 더 격렬해졌고, 다시 도전에 나서야할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부족하지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동통신 연대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담긴 독자의 제보도 받습니다 [편집자주]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현재 이동통신 시장을 이끄는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의 과거 모습을 어땠을까.

마치 삼국지연의를 연상시키는 이통3사의 대결구도는 사실 하나의 뿌리에서 태동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황제(정부)를 끼고 있었던 위 KT(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향후 지리적 이점(주파수)를 십분 활용한 오 SK텔레콤(당시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여러 부침(유랑) 속에서도 꿋꿋히 험준한 산맥에 자리잡은 촉 LG유플러스(당시 한국데이터통신)은 경쟁 구도 속에서 이동통신 시장을 키우겠다는 야심찬 국가 정책에 의해 태어났다.

1세대 통신을 나열하기에 앞서 이들의 태동기를 살펴야만 이후 벌어지는 치열한 접전과 경쟁구도가 보다 확연하게 드러나기에 먼저 이들의 시작을 언급하고자 한다.

한국전기통신공사 로고
한국전기통신공사 로고

◆ 역대 최대 규모로 탄생한 ‘한국전기통신공사’

과거 통신을 전담한 정부기관을 열거한다면 최초 1885년 한성전보총국을 꼽을 수 있다. 좀 더 가깝게는 해방 이후 1948년 발족한 체신부가 있다. 이 곳에서 주로 관할했던 업무는 소위 물리적으로 실어 나르는 아날로그 적인 우편 업무가 주된 사업군이었고, 통신은 전세계 진화발전방향과는 뒤쳐져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정보통신의 시류는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이었고, 우리나라 역시 반드시 극복해 내야 할 과제였다. 이 과정에서 통신사업의 규모는 점차 비대해져 감당할 수 없는 한계점에 봉착했다.

이에 따라 1980년초 체신부는 관료적인과 규제적 체계 내에서는 시장에서 빠르게 진화발전하는 통신기술을 쫓을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낡은 업무 추진 방식은 새로운 기술을 담아내기 어려웠던 것. 게다가 통신 사업의 잠재력이 컸기에 이대로 두면 경영관리마저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체신부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전무국(電務局) 등 산하 통신사업조직을 따로 떼어내 공사화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성된 ‘통신사업 경영체제 개선방안’은 결론적으로 1980년 12월 19일 대통령 재가가 떨어짐에 따라 눈 앞의 현실로 자리했다.

결정된 사안에 대해 체신부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공사 설립을 위한 본 바탕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 먼저 법적 근거가 필요했다. 1981년 3월 14일 한국전기통신공사법이 제정됐다. 공사 명칭 역시 법과 동일한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로 정했다.

1981년 12월 10일 드디어 체신부로부터 통신관할업무를 이관받은 ‘한국전기통신공사(KTA, Korea Telecom Authority)’가 창립됐다. 무엇보다 덩치가 컸다. 국내서 내노라하는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그 규모가 남달랐다. 지금까지도 KT가 재계 12위에 랭크될 정도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작부터가 비범한 탄생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설립자금은 2조5천억원. 모든 비용을 정부가 출자했다. 사원 역시 3만5천87명이나 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초대 사장은 이우재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국회의원이 내정됐다. 1981년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우재 사장은 7년간 한국전기통신공사를 이끌었으며, 이후 체신부 장관까지 역임했다.

창립 이후 1982년 1월 4일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했다. 당장 적체됐던 여러 통신 현안들을 해결해 정상화하는 한편, 특수 서비스를 도입하고 광통신을 매설하는 등 신속한 정보통신화를 이뤄냈다.

◆ 데이터 통신 독립조직의 시작 ‘한국데이터통신’

1980년대 초 체신부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창립 과제와 더불어 또 다른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다. 정보이용에 있어 낙후된 우리나라를 한단계 더 끌어 올리기 위한 대안이 필요했다. 데이터통신과 관련된 첨단기술에 대한 조기도입과 국내 정착을 앞당기기 위해 또 다른 조직 설립을 고려했다. 현재는 통신선을 연결해 데이터를 전송하는 사업이 특출난 것은 아니지만 당시만해도 수익을 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이에 따라 체신부는 1981년 ‘데이터통신 육성추진계획’을 수립하고 데이터통신 관련 조직 설립에 힘을 모았다. 이 결과 1982년 3월 10일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현 LG유플러스)’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법인 등기는 같은해 3월 29일 이뤄졌다.

한국전기통신공사가 20억원을 내놓고 민간 기업이 43억8천만원을 들여 총 63억8천만원의 자본금으로 설립됐다. 금성(현 LG전자)과 삼성 등 국내 내노라하는 기업들이 투자에 참여했으나 대주주가 한국전기통신공사였기도 했고 명확한 목적이 있었기에 독립된 경영체제를 갖췄다.

초대 사장으로는 삼보컴퓨터 설립한 기업인이자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을 지낸 바 있는 이용태 씨가 선임됐다.

한국데이터통신이 설립되면서 일반 가정에서도 컴퓨터로 처리된 각종 산업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날씨와 생필품시세는 물론이거니와 항공사와 기차표, 숙박 일정까지도 확인이 가능했다. 증권시세도 데이터를 통해 볼 수 있게 됐다. 즉, 생활정보를 안방에서도 열어 볼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국가기관과 산업체, 연구학술단체 등은 최신의 해외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됐다. 국제전용회선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직접 해외를 오고가는 번거로움이 사라졌다.

이후 한국데이터통신은 한국전기통신공사로부터 1982년 9월 국내 특정데이터통신회선서비스를 인수해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11월에는 미국 내 유수의 국제데이터오신전송업체 ITT월드 컴퍼니와 패킷교환 데이터통신운영협정을 체결하면서 국제데이터통신 서비스를 보다 빠르게 받아 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대체적으로 데이터 전송과 데이터 처리, 데이터 뱅크, 데이터 통신 개발 장비의 판매나 대여, 데이터통신 전용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표준화 작업, 기술상담 서비스 등을 도왔다. 당시 시설은 전파전송속도가 9천600bps(1초당 전파전송속도) 시차배분방식인 디지털전용회선을 활용했다.

◆ 초라한 외관에 위탁수익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시점으로는 막내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1984년 4월 30일 설립됐다.

역대 최대규모로 창립한 한국전기통신공사와 정부, 민간의 도움으로 독립 경영권을 확보하고 화려하게 등장한 한국데이터통신과는 달리 시작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수권자본금 5억원, 납입자본금 2억5천만원, 별도 청사가 없어 서울 성동구 구의동 소재 광장전신전화국 청사 내 사무실을 마련한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남의 집 빈공간을 빌려 32명의 직원을 거느린 스타트업과 다를 바 없었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 발족은 체신부,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무선호출과 함께 차량전화를 전담할 수 있는 전담회사 필요성을 인식하고 1984년 2월 10일 ‘차량전화 및 무선호출 전담회사 설립계획안’을 수립하면서 가시화됐다. 당시 이우재 한국통신공사 사장을 발기인으로 8명 전원 공사 관계자들로 구성했다. 초대 사장으로는 유영린 전 한국전기통신공사 원주지사장이 선임됐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의 초라한 시작은 그 당시 우리나라의 이동통신 시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종의 거울이었다. 그만큼 한국의 이동통신 기술발전 속도는 더뎠다. 주요 사업인 무선호출서비스나(삐삐) 차량다이얼전화(카폰)는 이미 선진국에서 애용되는 서비스였으나 우리나라는 희귀성으로 인해 과시욕을 불러 일으키는 도구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카폰을 직접 설치했던 현장사무소 역시 열악한 환경이었다. 광장전화국 부근 중앙무선전신국 마당 한 켠에 마련된 현장사무소는 천막을 이용한 임시건물이었다. 날씨에 극도의 영향을 받는 곳으로 직원들에게는 일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하지만 카폰을 설치하려는 고객이 하루 평균 40~70대 가까이 방문하면서 야근을 밥먹듯 했다.

돌이켜보면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당시 가장 초라하게 출발한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이후 국내 1위의 이동통신사업자로 성장했다. 역대 최대 규모로 창립한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오히려 관료주의의 흔적이 남아 안팎의 매서운 바람에 맞서야 했다. 또한 한국데이터통신 역시 ‘가난의 대물림’을 외치며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사진=김문기 기자]
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사진=김문기 기자]

① '삐삐' 무선호출기(上)…청약 가입했던 시절② '삐삐' 무선호출기(中)…‘삐삐인생' 그래도 좋다③ '삐삐' 무선호출기(下)…’012 vs 015’ 경합과 몰락 ④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上)…"나, 이런 사람이야!"⑤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下)…’쌍안테나' 역사 속으로

/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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