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과학 산업 경제
정치 사회 문화·생활
전국 글로벌 연예·스포츠
오피니언 포토·영상 기획&시리즈
스페셜&이벤트 포럼 리포트 아이뉴스TV

[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 박희재 SNU프리시젼 대표

본문 글자 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시 다른 기사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안녕하세요, 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코너입니다. 창업후 14년째 반도체장비 개발이라는 한 우물에 청춘을 다 바치며 외길인생을 고집하고 있는 탑엔지니어링 김원남 사장의 창업이야기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벤처기업을 창업해 성공하기까지는 정말 말 못할 고통과 엄청난 인내, 그리고 최선을 다한 자만이 누리는 뜻밖의 행운 등이 골고루 겹쳐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김원남 사장의 스토리에서도 다시한번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김 사장이 극찬을 하며 추천한 95번째 릴레이인터뷰 주인공은 요즘 세계 반도체산업계의 기린아로 불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에스엔유프리시젼㈜의 박희재 사장입니다.

“대학교수 출신 CEO중에는 아마 가장 성공한 분일 겁니다. 교수이자 엔지니어인 박 사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로 일본, 미국기업을 제치고 세계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정말 일류기업으로 키운 CEO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업종에 몸담으며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합니다. 이젠 눈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수 있을만큼 절친한 비즈니스 프렌드라고 합니다.

SNU프리시젼 박희재(44) 사장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인지, 과연 세계시장을 어떻게 주름잡고 있는지, 그의 사업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국내 기업중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회사는 얼마나 될까?

세계 메모리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 그리고 세계 1위기업 노키아를 맹추격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휴대폰사업. 이처럼 세계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수퍼급 시장지배력을 갖고있는 ‘another 삼성’이 국내 산업계에 얼마나 있을까?

설립 7년만에 반도체, LCD 등 하이테크산업용에 주로 사용되는 초정밀측정장비분야에서 세계시장의 73%를 장악하고 있는 초우량 토종 벤처기업이 등장,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인공은 SNU프리시젼. 이 회사는 세계 최초로 개발한 머리카락 굵기의 나노(1/10억m)급의 초정밀 측정기술을 토대로 세계 TFT-LCD 검사장비시장을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는 국내 순수혈통의 벤처기업.

관련자료 Download
SNU프리시젼 회사 소개서
대기업도 아닌 벤처기업이 창업 7년만에 세계시장 점유율 1위에 등극한 것은 국내 벤처산업계에 극히 이례적인 일. 코리아 벤처기업이 세계무대를 쥐락펴락하는 경우는 MP3플레이어로 세계시장을 장악한 레인콤 정도.

서울대 인근 낙성대입구에 위치한 SNU프리시젼 본사 박 사장의 집무실은 흡사 대학교수 집무실 분위기다. 온통 자료와 책자들이 사무실을 뒤덮고 있다. 실제 그는 CEO이자 현직 서울대 교수이기도 하다.

박 사장은 매우 소탈한 CEO다. 교수출신 답지않게 권위보단 세일즈맨 분위기를 풍긴다. 깎듯한 자세나,싹싹한 말투는 전세계를 다니며 물건파는 일에 이골이 난 세일즈맨의 모습 그대로다. 우람한 풍모만큼 너그럽고, 포용력있는 모습이다.

박 사장은 매우 야침이 큰 CEO다. 불과 창업 7년만에 세계시장을 주도한 것에 머물지 않고, 연매출 1조원대의 회사를 꿈꾸고 있다.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연륜이지만, 여전히 의욕과 열정이 넘친다.

박 사장은 계측산업분야에 있어 최첨단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국내 손꼽히는 전문가다. 명성만큼이나 기술과 상업화에 대한 노하우, 그리고 시장을 열어가는 사업적 감각은 벌써 노련한 CEO로서의 풍모를 물씬 풍긴다.

98년 설립된 에스엔유프리시젼은 나노급 초정밀 측정장비개발업체로 TFT LCD용 검사장비를 주력 생산,올해 매출액 768억원, 영업이익율은 40%가 넘는 284억원을 내다볼만큼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달 중순 공모를 거쳐 이달 25일 정식 코스닥에 입성할 예정이다.

◆ 준비된 엘리트

"박희재 학생, 자네의 논문내용이 국가경제에 얼마나 기여를 할수 있는지를 계량화해 데이터로 제시해주게. 기업체에서 인정을 해주는 수치라야 하네."

80년대말,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던 박희재는 박사과정 4년 내내 '숫자'와 싸움을 벌였다. '숫자와의 싸움'이란 자신이 쓴 논문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수치로 데이터화해야하는 작업.

산업체에서 데이터로 계량화해 검증해주지 않을 경우, 논문으로 인정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 "아마 박사과정 4년내내 기업체를 쫓아다녔을 겁니다. 수많은 기업들을 이잡듯이 뒤졌죠."

기업체 방문은 그야말로 당시 그에겐 끔찍한 '소모전'이었다. 회사를 방문하겠다고 전화만 하면 미안하다며 곧바로 전화를 끊는 통에 처음엔 방문조차 할수 없었던 것.

짧은 영어에 산업계에서 고개를 끄덕일만한 기술적 메시지를 던져줘야하는 상황에서 유학생 박희재의 시행착오는 '처절함' 그 자체였다.

"내 논문상의 기술이 당신 회사에 도움을 줄수 있으니 이를 적용할수 있게 산학공동으로 기술개발을 해보자는 제안이 핵심입니다. 문제는 해당기업에서 산학 공동연구시 자신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를 증빙해줘야 한다는 점입니다."

유학생 박희재는 이미 박사과정에서 자신의 기술을 어떻게 해야 상업화로 연결시킬수 있고, 이를 통해 해당기업, 그리고 경제에 얼마만큼의 도움을 줄수있는지를 4년이란 기간동안 처절하게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박사과정때의 이런 산학협동을 통한 상업화작업은 훗날 박희재가 대학강단에 머물지 않고 창업의 대열에 뛰어들게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논문내용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냐,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더라구요. 구체적으로 경제에 얼마나 기여를 할수 있는지를 증명해내고, 기여 정도를 데이터화해 제시해야한다는 거죠. 물론 이런 것들을 기업체에서 증빙해줘야하구요."

박희재는 이른바 엘리트코스를 밟은 정통 공학도출신. 서울대 기계항공학부졸업후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 사장은 1991년 포항공대 초빙교수로 화려하게 국내 학계에 데뷔한다.

당시 포스코는 포항공대를 일류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해외에 있는 실력파 교수진을 대거 초빙할 때였다. 1991년부터 포항공대에서 강단에 선 박희재 사장은 1993년 ,모교인 서울대로 옮겨 관악캠퍼스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그야말로 천재 엘리트로서 최고의 대학, 서울대 교수로 빠르게 자리잡은 박희재는 주위 동창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만큼 잘나가는 젊은 학자였다.

교수로서의 박희재 역시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여느 교수와는 달랐다.조용하게 안주(安住)하지 못하는 체질탓에 그는 책상만 지키는 교수생활에 만족하질 못했다.

그런 답답함을 푼 대안이 바로 산학협동 프로젝트. 학계에서 연구하는 논문이나, 기술 등에 대한 박희재의 시각은 여느 교수와는 확연히 다르다. 대학에 대한 그의 철학은 대학이 사회와 떨어져 있어서는 안되고, 밀착해 뭔가 기여를 해야한다는 ‘사회기여 의무론’이 핵심.

그는 대학에서 개발한 기술이 상품화돼서 시장에 나가야 하고, 이를통해 기업이나 국가경쟁에 보탬이 돼야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기여'가 이공계 기술개발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의무이자 책무라고 단언한다.

그가 서울대 교수로 10년간 재직하며 무려 100건의 산학협동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 역시 이런 나름의 확고한 철학 때문. 전자산업은 물론 자동차, 중공업, 자동화기계, 제철 등 안해본 분야가 없을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산학협동 연구에 나섰다.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 벤처기업 등 업종, 기업규모 역시 가리지 않았다.하지만 교수로서 그의 탄탄대로에 제동을 건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수없이 진행해온 산학협동프로젝트였다.

산학협동 연구를 할수록 사회적 명예와 부를 안겨다준 교수라는 직업에 회의를 갖게됐고, 결국 창업대열에 나선 것이다. 실전을 통해 닦아놓은 살아있는 기술력은 '성공'을 확신하는 '스페이드 에이스'였다.

박희재,그는 누구인가.
60년 경기 김포생.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79학번)학사,영국 맨체스터대학 박사출신.포항공대 교수.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현직교수.논문 200건 발표,특허 30건보유,100여건 산학공동개발프로젝트를 수행한 전형적인 엔지니어.적극적이고 스케일큰 스타일.해외유학파답게 실용주의자.뛰어난 기획력과 불도저와 강한 강한 추진력의 소유자.교수출신답지 않게 산업계에도 꽤넓은 마당발을 자랑한다.
취미 주중에는 강의,주말에는 늘 비즈니스차 해외출장을 가기 때문에 특별히 취미생활을 할 여유가 없다
술, 담배 많이 한다(담배는 하루 반갑)
친한 IT맨김원남 탑엔지니어링 사장,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박용석 DMS사장(이들은 얼굴만 봐도 마음이 통할만큼 친하다)
감명깊게 읽은 책성경과 고전을 꼽고싶다.
10년후 모습1조원대 매출볼륨을 갖춘 회사를 몇 개 갖는 지주회사를 운영하고 싶다.

◆ 운명의 순간, 대결단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나서야 합니다. IMF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축적된 캠퍼스의 기술을 상업화해 수출해야 합니다." IMF한파가 나라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했던 1998년초, 서울대 공대교수들은 캠퍼스 벤처창업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있었다.

결국 박희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98년 2월 서울대공대 실험실 1호 벤처기업 사장으로 변신한다. 당시 서울대 공대 30명가까운 교수들이 줄줄이 실험실 벤처기업을 창업, 비즈니스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서울대 영문이니셜인 'SNU'를 회사명에 넣었다.

박 사장은 대학원생 등 4명의 직원으로 실험실내에 회사를 차렸다. 박 사장이 대학내 실험실 벤처창업을 결심한 것은 공대교수들의 대토론이 있기 훨씬 이전이다.

박희재 교수가 무려 100건의 산학협동 프로젝트를 진행해오며 내린 결론은 산학협동은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 산학협동에 대한 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교수시절, 박 사장은 논문만 200건, 특허만 30여건을 한국을 물론, 미국, 일본 등에 출원해놨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연구에 몰두해온 연구파였다. 하지만 산학협동연구를 해본 박 사장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중소기업은 기술을 가르쳐줘도 배우거나 따라올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영업까지 해줘야하고, 영업 매뉴얼, 심지어 AS까지 해줘야 했죠."

그럴바에는 내가 직접하는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석, 박사의 80%가 대학, 정부출연연구소에 있는게 가장 큰 문제라는게 그의 지적.

"고급 인력은 죄다 대학, 정부연구소에 있고, 이들은 이론연구만 합니다. 중소기업에는 고졸출신이 대부분이죠. 구조적으로 산학협동이 효과를 거두기 힘듭니다." 수백건의 논문, 엄청난 산학협동연구를 했지만, 늘 이론에만 그치는게 불만이었다.

박희재의 철학과 경험은 이미 그로 하여금 사업가로 한발짝씩 나서게 하고 있었다. 오랜 산학협동을 통해 확보한 기술력은 확실한 그의 사업밑천이었다.박 사장의 첫번째 실험은 순조로왔다. 1999년말 기계정밀장비를 개발, 스웨덴에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 뼈저린 실패, CEO의 의미

박 사장 집무실 벽면에는 1달러짜리 지폐 한장이 액자속에 걸려있다.스웨덴에 1만달러어치를 수출했던 게 너무 감격스러워 기념으로 한장 모셔놓은 것.

하지만 SNU프리시젼은 사업초기 실패의 연속이었다. 1999년말 첫 작품으로 기계정밀도 측정장비를 개발, 판매에 나섰던 그는 "기술만 가지고는 절대 안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한다.

시장이 거의 없다는 사실앞에 그는 처음으로 좌절을 맛본다. 하지만 그 것은 곧 불어닥칠 엄청난 고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어렵사리 응용분야를 뒤져 두번째 시도한 광부품검사장비. 2000년이후 세계 IT경기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또다시 실패작으로 돌아갔다.

단돈 5천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이지만, 벌써 주위 여기저기서 몇 억원을 끌어다 쓴 상황이었다. 사업의 첫번째는 영업, 두번째는 자금이라는 사실을 그는 사업초기 처절하게 절감했다.

금새라도 숨이 꼴깍 넘어갈것 같던 2000년중반, 동료교수와 지인 등 엔젤 투자자로부터 10억원을 투자받았다. 하지만 1년도 안돼 흔적도 없이 소진됐다.

2000년말부터 2002년초반까지 2년여기간은 그야말로 '교수' 박희재 인생에 가장 처절한 시기였다. 그야말로 밑바닥인생이었다. 30명으로 늘어난 식구들 월급날은 어김없이 돌아왔고, 늘 급전을 빌리느라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월급 하루전날, 급여를 구해야하는 사실을 누구에게 말할수도, 도움을 구할수도 없는 고독한 외로움을 난생 처음 겪은 그는 그렇게 처절하게 2년여를 견뎌야 했다. 하루에도 몇번이고 "사업을 접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CEO가 어떤 의미인지를 사업을 하며 깨달았다고 한다. "CEO는 정말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CEO들은 유전자가 다르다는 말이 괜한 농담이 아님을 절감했죠."

그는 교수로서의 화려한 명예와 사회적 지위,그리고 먹고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경제적 안정을 마다하고 왜 사업을 시작했는지, 수십번도 더 후회를 했다고 술회한다. "제가 만약 사업이 이런거다라고 알았더라면 절대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꺼져가던 회사에 한줄기 빛이 찾아들었다. 기술력을 보고 KTB, 산업은행등에서 2001년말께 30억원을 투자해준 것. "아마 그 때 투자못받았으면 회사는 문을 닫았을 겁니다. 믿고 투자해준 기관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투자에 이어 2002년 중반, 박 사장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든다. 그 것은 바로 'LG필립스LCD'였다.

에스엔유프리시젼, 어떤 회사인가
설립일1998년 2월 20일
종업원 100명
자본금15.36억원
연락처(02)877-1574 www.snuprecision.com
사업영역LCD 정밀측정장비 외
경영목표World Best, Creativity and Challenge, Value Oriented
매출목표 2005년 768억원

◆ 목숨건 승부수, 이어진 질풍노도

2003년초, 칼바람이 부는 구미공단 LG필립스공장 인근. 엄동설한 한겨울밤을 차에서 새우잠을 잔 박희재는 해가 밝자마자 LG필립스공장으로 향한다.

2002년 중반, 우여곡절끝에 신공정에 대한 측정장비개발을 요청해온 LG필립스LCD는 박 사장에게 그야말로 구세군에 다름아니었다. 뛰어난 측정기술을 갖고있다는 소문을 듣고 연락을 해온 것.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우여곡절끝에 6개월만에 장비를 개발, 납품한 그로서는 공장밖에서 밤새 잠을 청할만큼 LG필립스LCD는 금과옥조 같은 고객사였던 것.

첫 장비의 성공여부는 향후 엄청나게 기대되는 LG필립스 수주물량을 잡느냐를 결정짓는 분수령이었다. 그는 개발은 물론,납품후 개보수 및 업그레이드 등 모든 것을 현장에서 직접 챙겼다.

현장에서 살다시피하는 동안 제품 성능은 빠르게 업그레이드됐다. 2002년 상반기, LG필립스LCD로부터 'OK' 사인이 나면서 박희재는 지긋지긋하던 2년여의 밑바닥인생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2002년 LG필립스LCD 장비납품에 성공하면서 매출은 단숨에 38억원대로 뛰어올랐다. ‘LG필립스LCD’라는 기회를 꽉 웅켜쥔 박희재는 2002년 그 와중에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두번째 토끼를 잡기 시작한다.

“국내 시장만으로는 생존하기 힘들었습니다. 해외시장을 뚫어야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법칙이었습니다." 대만, 일본, 중국을 누비고 다닌 박 사장은 2003년 78억원매출을 올리며 탄탄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놀라운 것은 SNU프리시젼의 대표작인 대형 LCD 제작에 필수적인 인라인(In Line) 비접촉식 광응용 3차원 나노형상 측정장비(PSIS)의 경우, 세계 최고로 메이저 LCD업체들이 모두 채택했다는 사실이 퍼지면서 2004년 곧바로 '대박'으로 이어진 것.

무려 한해 412억원의 매출에, 영업이익이 40%대가 넘는 167억원대을 기록하는 어마어마한 실적을 낸 것. 숨넘어가던 회사가 불과 2년여만에 폭풍 같은 기적을 만들어내며 세계시장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객사는 국내 LG필립스LCD, 삼성전자를 비롯, 일본의 DNP, NEC, ACTI, 히다찌, 대만, 중국의 유수 LCD업체를 총망라하고 있다.

박 사장은 지금도 격주로 비행기에 오른다.여전히 영업과 기존 고객사 유지관리업무를 직접 챙긴다. SNU프리시젼의 올해 목표는 768억원의 매출에 254억원규모의 영업이익을 달성한다는 것.벌써 수주규모는 목표치의 절반을 넘을만큼 호조다.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앞세운 SNU프리시젼의 독보적인 제품성능은 ‘글로벌 넘버원’이다.최근 미국 자이고(Zygo)와 일본 다카노(Takano) 등 경쟁사가 생겼지만,SNU프리시젼은 세계시장 점유율 73%를 기록하며 독주를 이어가고 있다.

주식 공모가가 2만5천~2만9천원대로 액면가(500원)의 50배가 넘는 것을 보면,이 회사의 내재가치 및 성장잠재력을 쉽게 짐작할수 있다.

◆ 박희재의 성공론, 그리고 꿈

박 사장의 집무실 벽면에는 ‘세계 10대 장비메이커’리스트가 붙어있다. 미 어플라이드사를 1위로 해서 일본 TEL사, 미국 ASM 등 연매출 10조원대를 넘나드는 세계적 장비업체들이 랭킹별로 표시돼 있다.

“앞으로 5년후, SNU프리시젼을 매출 1조원대의 회사로 키운다는게 저희들 목표입니다. 반드시 세계 톱10 장비기업으로 키울 생각입니다." 박 사장의 야무진 꿈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가 본게임이란다. 그전에는 돈이 없어 못했지만, 이젠 글로벌기업으로 클수 있는 인프라를 갖췄기 때문에 이런 10대 기업과 한판승부에 나설수 있게 됐단다.

"SNU프리시젼은 현재 광학설계, 메카트로닉스, 나노 미트롤로지, 나노 기반측정 등 4개의 첨단 공학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핵심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주력 제품인 LCD 검사장비는 이런 원천기술을 활용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활용분야를 기계, 자동차 등으로 확대, 세계적 장비업체로 발돋음한다는 전략이다.직원 개개인이 모두 전사(戰士)가 되지 않으면 세계무대에서 이길수 없다는게 그의 지론.

규모가 커지면서 관리사장이 필요하지 않냐는 외부의 지적에 대해 그는 단호하게 손사래를 친다.하이테크 분야에서는 기술과 실력으로 고객사를 압도하지 못하면 명함을 내밀수 없다고 설명한다.

대기업에서 관리좀해본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면 회사를 더 키울수 있다는 제안은 정말 현실감이 없는 한가한 생각이라는 게 그의 설명.

"없는 상황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게 벤처기업 CEO입니다.조금 규모가 된다고 전문경영인 운운하는데 정말 한가한 발상이죠. 미국, 일본 기업은 프리미엄이 대단하죠.한국기업은 아직도 2류로 취급받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싸움은 처절합니다."

그의 성공론이 궁금하다. 그가 으뜸으로 치는 것은 '기술'. "기술은 생명입니다.기술이 없이 사업을 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두번째는 역시 ‘영업’.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시장에서 평가를 받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물론 영업을 잘하려면 기술을 쥐고 있어야 합니다. 남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요소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그리고 열정과 우수한 인력이 있어야 성공할수 있단다. 박 사장은 SNU프리시젼의 경우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수퍼급인력이 6명 가량된다고 귀뜸한다. 모두 서울대 박사출신들이다.

박 사장은 궁극적으로 고객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강조한다. 회사내 출퇴근 개념이 없는 것도 이 때문. "모든 것은 철저히 고객으로부터 평가를 받고,이런 성과와 실적위주로 전직원을 철저히 평가를 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대학강단에 머물지 않고 험한 벤처창업에 뛰어든 박 사장의 결단은 확고한 나름의 철학때문이었다.

"저는 자손들에게 물려줄 것은 땅이나 유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즈니스프레임을 만들어 물려주면 그것이 가장 좋은 유산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유산을 만드는 일이 바로 이 땅의 지식인, 리더들이 해야할 의무라고 그는 설명한다.

창업 7년여만에 에스엔유프리시젼을 세계시장 점유율 1위기업으로 발돋음시켜놓은 박희재 사장. 그는 앞선 생각을 가진 교수이자, 세계시장의 흐름을 꽤차고 있는 글로벌 마케팅전문가였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박희재 사장은 연매출 800억원대에 가까운 글로벌기업을 경영하는 CEO이지만 아직도 서울대 현직교수로 강단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수직을 버리는게 아깝고,혹 사업이 잘못됐을 경우에 대비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노'라고 말했습니다. 서울대 공대의 고급인력 인프라를 활용,좋은 기술을 상품화할수 있고, 또 고급인력을 충원하는 좋은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해 병행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주요뉴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 해주세요.
alert

댓글 쓰기 제목 [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 박희재 SNU프리시젼 대표

댓글-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로딩중
댓글 바로가기


뉴스톡톡 인기 댓글을 확인해보세요.



TIMELINE



포토 F/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