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길 모퉁이만 돌아서면 무엇인가 쓸만한 것이 꼭 나올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으로, 손목의 통증을 무릅쓰고 마우스를 클릭해 나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재생(Replay)해 보라. - 본문 중에서 -
며칠 전 서재를 정리하다 보니, 컴퓨터와 프린터가 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비좁은 책상 위가 눈에 거슬렸다. 이 참에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PC본체를 책상 아래로 내리고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스피커나 모뎀, CD 케이스, 디카 충전기 등을 정리하기 위해 컴퓨터용 액세서리 몇 가지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잘 알려진 경매사이트에 접속했다. 가격도 매우 싸고 종류도 많았다. 바로 사버릴까 하다가, 세가지 상품을 골라야 하고 제조업체도 각각 다르기에 배송 비를 따로 지불하자니 싸게 사는 이점이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을 잠시 보류하고 쇼핑몰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형 쇼핑몰답게 경매사이트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제품 값이 조금 더 나가지만 물건의 질이 어느 정도는 걸러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너 종류 제품을 사도 배송 비 부담이 없고, 적립금을 이용하면 경매사이트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만족했지만 필요한 제품을 장바구니에 담아두기만 하고 일단 로그아웃 버튼을 눌렀다. 다른 곳에서 무엇인가 더 나은 결정을 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점심 시간에 잘 알려진 쇼핑몰 사이트 몇 군데를 더 들락거렸다. 대기업 계열사 에서 운영하는 L, C, S몰까지 까지 유사한 제품을 살펴보았으나 별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구매 결정을 하려는 순간, 또 다시 머리 속에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컴퓨터 관련 제품인 만큼 컴퓨터와 주변 기기 전문점에 가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간 날 때 들르기로 마음먹고 한번 더 결정을 미루었다
퇴근 후에 서재에서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여정에 돌입했다. 잘 알려진 컴퓨터 용품 매장을 둘러보았다. 생각과는 달리 종류가 많지 않았고, 가격은 그렇다 치더라도 만족할 만한 제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컴퓨터 용품 전문 매장 몇 군데를 더 기웃거렸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포기하고 애초에 봐두었던 쇼핑몰 사이트에서 구매를 할까 했으나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다! 가구점이 남아있었다. 곧바로 검색 사이트로 옮겨가서 소품 가구를 주로 취급하는 사이트 몇 곳을 찾아 나섰다. 조금 시간이 걸렸으나, 원하는 사이트 몇 군데를 들렀다. 생각 한대로 제법 쓸만한 물건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격이 오히려 더 비쌌다. 각각 배송을 받는 경우에는 비용이 더 들 것이 뻔했다. 실망감과 함께 오랜 쇼핑으로 팔꿈치의 통증을 느끼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데 시간은 벌써 밤 9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눈도장을 찍어두었던 사이트에서 바로 사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나는 한 시간 전부터 독후감 쓰기를 도와달라고 졸라대던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끌려가고 있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잠자리에서, 십 수년 전의 미국 대형 쇼핑몰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맏 아이의 옷을 사려고 하루 종일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냈었는데, 결국 옷을 사긴 했지만 다섯 개나 되는 쇼핑몰을 모두 둘러보느라 다리가 마비될 정도였다. 쇼핑몰을 나서면서, 결국 그게 그거인 쇼핑몰을 모조리 헤매고 다닌 일이 어리석게 느껴졌고, 선택권이 많은것이 도리어 짐이 된다고 내심 생각했었다.
컴퓨터 용품 몇 개 사려고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이는 지금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물론 사이버 공간이기에 물리적인 피곤함이나 시간 소모는 덜 했을지라도, 그 ‘쓸모없음’의 정도는 더 심한 듯싶었다. 인터넷으로 인해 소비자들에게는 엄청난 선택권이 주어진다. 또한 우리들 역시 풍성한 선택권을 누릴 수 있다는 장점에 매료되어 인터넷 쇼핑을 애용한다. 그러나 선택권의 정도가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서면 그 때는 정보가 아닌 공해로 작용한다. 아마도 공해의 수준을 넘어서면 재앙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한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제품의 종류와 정보가 워낙 방대하여 그럴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소비자가 사이버 공간에 익숙한 결과로 인해 무엇인가 더 나은 선택을 위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무의식적 습관성 행동의 결과가 대부분인 듯싶다. 나 역시 후자에 속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번 길 모퉁이만 돌아서면 무엇인가 쓸만한 것이 꼭 나올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으로, 손목의 통증을 무릅쓰고 마우스를 클릭해 나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재생(Replay)해 보라. 시간이 갈수록 선택권은 더욱 증가할 것이고, 더 나은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길 모퉁이 증후군'은 꾸준히 우리의 의식 세계를 무감각으로 물들이지 않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꿈에서 깬 듯, 더 나은 선택은 "적정한 제약을 선택하는 것” 임을 깨닫지 않을까? 확실히 조롱 섞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d)가 실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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