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사장은 기업체의 사회환원에 대해 매우 남다른 책임감을 갖고있고,실제 사회환원을 실천하고 있는 몇안되는 CEO다.
강남 사무실에서 만났다.스타급 CEO로서의 높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조 사장은 매우 소탈하다.사업한지 20년이 넘었건만,여전히 진지하다.유독 반짝이는 눈매는 창업 2,3년차 같은 느낌을 준다.
조 사장은 매우 반듯하다는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다.어느것 하나 허튼 게 없고,생각과 행동 역시 항상 반듯하다.예를들면 이런식이다.
그는 원조 벤처 1세대 CEO지만 아직도 골프를 들떠보지도 않는다.이유는 직원들한테 열심히 일하라 해놓고,사장혼자 운동하는 것은 맞지않다는 나름의 고집스런 생각때문이다.
물론 휴일에만 하면 문제없지만,하다보면 평일에도 운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고,그런 개연성 자체를 아예 없애겠다는 심산이다.조현정 사장의 성격을 잘 대변하는 대목이다.
그는 베테랑 CEO답게 시장과 비즈니스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남다르다.완숙한 경영수완과 산업전체를 바라보는 폭넓은 시야는 단연 볻보인다.
비트컴퓨터는 83년 당시 대학 3년생이던 조 사장이 창업,설립 22년째를 맞고있는 1세대 벤처기업.초창기 의료정보화의 사업모델을 아직도 고집하며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창업후 내리 17년간 흑자행진을 이어왔을만큼 승승장구했고,2004년 역시 320억원대의 매출을 예상할만큼,탄탄한 대표적 모범기업이다.
◆ 지독한 가난,12살짜리 전파상 기술자
현정아,선생님이 등록금,생활비를 대줄테니 제발 학교공부를 그만두지 마라” 71년초,중학교 2년생인 15세의 조현정은 무작정 학업을 중단한채,충무로 전파상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재능을 아까워하던 선생님의 설득도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공부가 싫고 기술배우기를 좋아했던 조현정은 그 길로 전파상 가전제품수리공으로 변신,충무로에서 3년여간 일한다.어린 조현정이 학업을 중도포기하고 전파수리공으로 나선 것은 갑짝스레 찾아든 집안의 몰락때문.
조현정은 김해시 한림면 부자집에서 태어났다.대지만해도 2천평이 넘는 큰 집에서 살았다.하지만 여섯살 때 부친이 작고하면서 집안은 급격히 몰락했고,조현정의 운명역시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온가족은 서울 이문동에 부엌도 없는 월세 단칸 쪽방으로 옮겼다.생활전선에 뛰어든 조현정은 충무로에서 ‘업자수리 전문가’로 통했다.
즉 전파상에서 고치지 못하는 가전제품을 가져오면 고쳐주는 이른바 전파상을 대상으로 하는 종합수리센터였던 것.
“당시 전파상들이 가져오는 제품은 더 망가뜨려오기 일쑤였습니다.이리저리 손을 대다가 망가져 더 이상 손쓸수 없으면 가져오죠” 하루에 TV를 13대씩 수리할 정도의 수리숙련공이 돼있었다.
조 사장은 지금도 두 손 내밀기를 쑥쓰러워한다.두 손등에 굵직굵직하게 불거져있는 흉터자국때문이다.무거운 가전제품을 옮기다가,혹은 철제캐비넷의 칼날같은 모서리에 베여,고사리 같은 두 손은 성한 날이 없었기 때문.
3년가까이 지난 73년,조현정은 TV,오디오는 물론 냉장고,에어컨 등 국산은 물론 고장난 외국제 고가 가전제품을 가장 잘고치는 전문가로 충무로일대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그 때 조현정은 불과 17세,학교를 다니면 고등학교 1년생 정도의 나이였다.
73년늦은 봄,조현정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이유는 화이트칼라가 되려면 졸업장은 있어야한다는 나름의 판단에서였다.무려 3년가까이 전파수리공으로 일에 묻혀있었지만,조현정은 총명한 소년이었다.
당시 조현정은 이미 영어 알파벳순서도 제대로 외우지 못할 정도로 공부와는 담을 쌓은 상태였다.하지만 어린 조현정은 남달랐다.그의 승부사적 기질은 이때부터 발휘된다.
공부를 시작한후 맞이한 7,8월,이문동의 단칸방은 한껏 달궈진 슬라브지붕탓에 그야말로 한증막 그자체였다.선풍기는 꿈도 못꾸던 시절이었다.천정이 얼마나 더웠으면 그 한여름에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를 했을까?
그는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지 83일만에 당당히 검정고시에 합격했고,이듬해인 74년 용문고에 입학한다. 유년시절의 조현정은 이미 목표한 것은 반드시 이뤄내는 강인한 소년이었다.
조현정,그는 누구인가
57년 경남 김해생. 검정고시와 용문고, 인하대 전자공학과 졸업. 대학 3학년 재학시절 대학생 벤처 1호인 비트컴퓨터를 창업한 1세대 벤처기업가.강한 추진력의 소유자.뛰어난 친화력과 리더십이 강점.늘 주위에 사람이 많은 벤처산업계 마당발.
취 미
집에서 DVD로 영화보기
운동
스스로 몸치란다.청계산을 오르는게 유일한 운동.
존경하는 CEO
선악 모두 선생이다.
친한 IT맨
장흥순 터보테크사장,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사장 등 벤처기업협회 회원사 사장과 두루 친하다.
술
소주 한병(담배는 배우지 않았다)
10년후 모습
40대의 얼굴을 책임지는 모습이 돼있기를 희망한다
◆ 청량리 맘모스호텔을 아시나요?
이미 중학교때 충무로에서 온갖 국산,외제 가전제품을 수리하며 이미 전자제품전문가 수준에 올라있던 조현정에게 이론공부가 귀에 들어올리 만무했다.
다짜고짜 교수를 찾아간 조현정은 강의는 들을 필요가 없으니,연구를 할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교수들은 반신반의하며 그의 실력을 테스트했다.
늘 시간이 틀리는 대형 시계탑과 고장난 방사능측정기를 고쳐보라고 주문한 것.70년대말 당시는 전기공급이 불안정해 아날로그시계는 당연히 시,분 초침의 움직임이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었다.
다 뜯어본 조현정은 결국 시계속을 디지털방식으로 바꿨다.시계탑 시각은 그이후 정확하게 맞아들어갔다.방사능측정기 역시 3일만에 뚝딱 고쳐놓았다.
곱상하게 생긴 신입생의 현란한 솜씨에 인하대 교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야말로 ‘물건’이 하나 들어왔다는 반응이었다. 그 사건이후 인하대는 조현정을 꼭 필요한 특급 기술자쯤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대학 1년생 조현정은 그 때부터 개인집무실을 두고,한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450만원씩을 학교로부터 지급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당시만 해도 교수들 역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막 전환할 때였습니다.즉 아날로그전문가 입장에서 디지털 전문가인 저와 함께 연구를 하면 시너지효과가 있을 걸로 교수님들이 생각하셨던 것같습니다”
학비면제에 스쿨버스를 타고다니고,연구실까지 둔 조현정은 무늬만 대학생이지 실제는 교직원내지 조교쯤되는 상황이었다.대학 2학년때부터는 교수들과 공동프로젝트를 수없이 진행한다.
조현정은 2학년때부터 수업은 거의 듣지 않는다.그의 대학동기생들이 조현정이란 학우를 잘 모르는 것도 이 때문.83년,군복무후 3학년에 복학한 조현정은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다.학업도,프로젝트도 별 흥미가 없었기 때문.
결국 “이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 조현정은 ‘창업’을 결심한다.그는 당시 청계천소재 PC기술지원 회사에 하드웨어 만드는 기술을 지원해주고 있었던 터라,막연하게나마 컴퓨터관련쪽 사업을 할수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83년,8월,창업에 나섰다.남동생과 전화받는 여직원 딱 3명이 전부였다.사무실은 뜻밖에도 청량리역앞 맘모스호텔내에 마련했다.
“밤낮없이 개발해야하는데,24시간 출입이 가능하고 냉난방이 잘돼는 곳이 호텔말고는 없더라구요.실제 단순히 싼 임대료 사무실을 얻는것보다,일의 효율이나 전체 효용가치를 따지면 호텔이 훨씬 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아닐수 없다.월 60만원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하지만,조현정의 수지타산에 대한 생각은 확고했다.하루 17시간씩 일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업아이템을 찾아내는 그의 동물적인 사업감각이었다.정작 사업아이템을 PC용 SW로 정했지만,그는 SW에 대해,하드웨어를 구입하면 공짜로 끼워준다는 인식이 널리 펴져있는 점을 간파했다.
타겟고객층은 인텔리이고 돈이 있는 층이라야하는 결론을 내린다.나름의 논리근거를 집합,업종을 뒤진후 내린 결론은 ‘의사’였다.
“의료분야를 뒤져봤더니,의사들이 보험청구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더라구요.매달 의사와 부인,간호사 모두가 보름간을 매달려 수작업으로 보험청구건을 입력하고,합산을 하더라구요.틀리면 또하고 또하고 말입니다”
무릎을 쳤다.비트컴퓨터 최초의 사업아이템 보험청구프로그램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보험청구를 위해 매달 보름씩 매달리던 의사들로썬 한달에 2,3일정도 단말기에 데이터만 쳐넣으면 끝나는 보험청구프로그램은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병원당 150만원에 판매했다.엄청난 고가였지만,날개돋치듯 팔려나갔다. 지방에서는 왜 안파냐고 난리였다.8월에 창업한후 연말까지 올린 판매고는 무려 5,000만원.대학생 CEO 조현정은 첫 작품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국내 최초로 개발한 보험청구프로그램은 비트컴퓨터가 창립후 회사로서 자리를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효자’아이템이었다.
비트컴퓨터가 20년넘게 의료정보화 전문기업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 역시 보험청구프로그램이 크게 작용했다.10대의 나이에 전자제품 엔지니어로 탄탄한 현장경험을 갖춘 조현정은 여느 대학생과 다른 청년이었다.
그는 이미 20대에 창업,흑자행진을 계속할만큼 경험과 나름의 비즈니스감각을 갖춘 될성부른 벤처기업가였다.
◆ 질풍노도,조현정의 성공신화
조현정 사장이 장관과의 면담때 제안한 게 바로,우수연구인력 양성을 위한 병역특례제도.산자부의 병역특례제도는 이렇게 탄생했다.비트컴퓨터는 덕분에 병역특례기업 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비트컴퓨터는 84년부터 성장의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한다.종합병원 의료정보화사업을 본격화하고,IBM과 협력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비트컴퓨터의 비즈니스감각은 날로 발전한다.
86년,IBM은 분야별 우수 SW개발회사를 대상으로 VAR(Value Added Remarketer)을 지정했다.선정된 4개사중 비트컴퓨터를 제외한 3곳은 쌍용 등 모두 대기업.고작 직원 16명에 불과한 비트컴퓨터가 선정된 것은 그만큼 기술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87년,국내 처음 내놓은 병원 원무관리프로그램 역시 불티나게 팔리며 2의 효자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88년 서울올림픽때 올림픽조직위에 납품한 성화봉송관리소프트웨어는 조 사장의 비즈니스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케이스.
“올림픽에 뭔가 기여를 하고싶습니다.성화봉송주자의 얼굴이 나오고,소리까지 나는 멀티미디어방식의 프로그램을 짤수 있습니다.기회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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