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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동전화서비스 20년 약사(略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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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월 1일. 대통령령에 의해 국내 통신시장에 큰 변화를 몰고 올 2가지 의미 있는 조치가 취해진다. 하나는 당시 체신부 내에 '통신정책국'을 신설토록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전기통신공사를 설립해 급증하는 통신수요에 부응토록 한 것이다.

전자는 이후 정보통신정책을 체신부가 주도함으로써 국내 통신산업 발전이 힘을 받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고, 후자는 전화보급의 확대의 계기가 됐다.

이후 82년 10월 이동무선전화현대화계획에 따라 미국으로 부터 셀룰러 방식의 차량전화 시스템이 처음으로 도입되고 84년 4월 2일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에 의해 국내 최초로 이동전화 서비스가 시작됐다.

이에 앞서 같은 해 3월 19일 무선호출(삐삐)과 차량전화서비스를 전담할 회사로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출범했다. 이 회사가 오늘날 SK텔레콤의 모태가 됐다.

첫선을 보인 차량전화는 단말기를 포함한 가격이 400만원이 넘었다. 그러나 서비스 한달만에 2천명이 넘는 신청자가 몰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물론 아직 통화품질은 만족할 수준이 못됐다.

이듬해인 85년 7월에 단말기 임대제가 시행에 들어가 구입비가 대폭 인하돼 87년 12월에는 차량전화 가입자가 1만명을 돌파한다.

요즘과 같은 의미의 휴대전화서비스는 서울올림픽을 앞둔 88년 7월 1일 첫선을 보였다.

특히 91년에는 국내 업체에 의해 단말기 대량생산이 시작되면서 휴대전화는 차량전화 보급대수를 앞질러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 95년 1월 100만명 돌파 ▲97년 9월 500만명 돌파 ▲98년 6월 1천만명 돌파 ▲99년 8월 2천만명 돌파 ▲2002년 3천만명 돌파 등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90년 7월 12일은 우리나라 이동전화서비스에 중요한 날이다. 당시 체신부는 '통신시장 구조조정 계획'이란 것을 발표했다. 핵심내용은 한국이동통신외에 새로운 회사를 하나 더 설립해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는 것.

이 때 전국 9개 도별로 1개씩과 서울에 2개의 무선호출 사업자를 선정하겠다는 방침도 함께 발표됐다.

체신부의 이 발표는 이른바 '제2 이통사업권'획득을 위한 재계의 대전쟁을 불러왔다. 이에따라 불공정방지를 위해 삼성, 현대, 금성(현LG), 대우 등 장비제조업체가 배제된 가운데 선경, 포철, 코오롱, 동양, 쌍용, 동부 등 6대 그룹및 대기업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92년 7월 29일 1차 심사결과 선경주도의 '대한텔레콤'과 코오롱의 '제2이동통신', 포철의 '신세기이동통신' 등 3개 기업이 선정됐다.

이어 같은 해 8월 20일 2차 심사결과 발표에서 '대한텔레콤'이 최종 사업권을 갖게 됐다.

그러나 선경은 오너인 최종현 회장이 당시 현직 대통령(노태우)과 사돈간이라는 이유로 국민여론이 좋지 않았으며, 6공 말기의 정치권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과 1주일만에 사업권은 '백지화' 되고 만다.

8월 27일 대한텔레콤은 기자회견을 통해 '오해 받을 우려가 없는 다음 정권에서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아 제2 이동통신 사업을 재추진 하겠다"며 사업권 반납을 발표했다.

그러나 선경은 결국 제2 이통을 손에 넣지 못하고 나중에 제1 이동통신격인 한국이동통신을 매입하게 된다. 이 것이 SK텔레콤의 전신이다.

한편 93년 12월 10일 신정부는 민간자율에 의한 단일컨소시엄 방식과 컨소시엄 구성을 전경련에 위임한다는 사업자 선정계획을 발표한다.

이에따라 전경련은 94년 2월 사업신청서와 사업계획서 접수를 받아 합동심사를 거쳐 94년 2월 28일 포철이 주도하고 코오롱을 2대주주로 선정해 체신부에 통보했다. 이로써 4년을 끌어온 제2이동전화 사업자 선정은 일단락 됐다.

그러나 당시 재벌들이 삼성그룹의 서울 한남동 소재 영빈관인 '승지원'에 모여 '선경의 제2 이통 사업권 포기 약속'등을 내용으로 하는 '밀약'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재벌들간의 약속은 이후 제2 시내전화 사업자인 하나로통신(현 하나로텔레콤)이 설립될 때 상호 견제용으로 작용, 지분을 골고루 나눠 갖도록 하기도 했다.

한편 SK그룹은 그 후 94년 1월 24일과 25일 이틀간 진행된 한국이동통신 민영화를 위한 공개입찰에 참여해 4천271억2천만원(23%, 127만5천주)을 투자해 한국이동통신(KMT)를 인수한다.

이후 같은해 6월 2일 한국통신은 한국이통통신의 지분 20%만을 남기고 모두 매각한다.

그러나 이 남은 20%의 지분은 두고두고 SK텔레콤의 발목을 잡았으며, 급기야 한국통신민영화 과정에서 역으로 SK그룹이 기습적으로 지분 인수에 참여함으로써 한동안 양측간의 깊은 갈등을 낳는다.

어쨌든 SK그룹은 94년 7월 7일한국이동통신 임시주총에서 실질적인 경영권을 갖게 된다.

한편 92년 12월 3일 정부는 이동통신 원천기술을 CDMA로 단일화 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아직 세계 어디서도 상용화에 성공하지 못한 상태여서 이후 국내 상용화 진척이 답보상태에 빠진다.

이에 93년 9월 16일 한국이동통신내에 '이동통신 기술개발 사업관리단'이 발족된다. 당시 단장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나중에 SK텔레콤의 사장을 지내고 과기부 장관을 역임하는 서정욱씨다.

서 단장은 공동개발이 아니라 중복의 위험을 무릅쓰고 업체간 경쟁개발이라는 카드를 빼들어 결국 94년 11월 18일한국이동통신 중앙연구소에서 당시 윤동윤 체신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CDMA 시스템과 아날로그 시스템, 유선전화(PSTN) 사이의 상호통화에 모두 성공했다.

그러나 95년 5월 PCS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준비업체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TDMA 방식으로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CDMA냐 TDMA냐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고, 95년 10월 20일 정보통신부는 'PCS무선접속방식을 CDMA로 단일화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CDMA에 힘을 실었다.

한편 99년 12월 31일, 한 세기를 마감하는 날 84년 차량전화와 함께 시작돼 15년간 유지돼 온 아날로그 이동전화가 서비스 중단됨으로써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97년 10월 1일에는 PCS 3사(한국통신프리텔, LG텔레콤, 한솔PCS)가 예정보다 2개월 빨리 일제히 상용서비스에 들어갔다. 이로써 국내 이동전화 서비스 시장은 본격적인 경쟁기를 맞으며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99년 12월 24일 SK텔레콤은 공정거래위원회에 신세기통신지분 51.9%를 인수한다는 기업결합신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2000년 4월 26일 공정위는 ▲2001년 6월까지 시장점유율을 50% 이하로 낮출것 ▲SK텔레텍 단말기 생산대수를 2005년까지 연간 120만대 이하로 유지할 것 등을 조건으로 기업결합을 승인한다.

2000년 12월에는 동기식과 비동기식을 놓고 치열한 논쟁끝에 정보통신부는 SK IMT와 KT 아이컴에 비동기식 IMT-2000 사업권을 부여한다. 당시 정부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 한 CDMA의 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기식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유도했으나 업체들은 세계적으로 시장이 넓은 비동기식을 고집했다.

결국 SK와 KT는 정부의 뜻과는 반대로 비동기식으로 사업권을 받고, 추가 신청을 받는 우여곡절 끝에 LG가 동기식 IMT-2000 사업권을 받는다.

이 때 정통부는 동기식을 신청한 LG에 대해 출연금을 인하해주었으며 향후 비대칭 규제를 통한 간접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후 2001년 5월 한국통신프리텔(현 KTF)이 한솔엠닷컴(구 한솔PCS)과 합병을 하고, 2002년 1월에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이 합병을 완료함에따라 국내 이동통신서비스 회사는 5개에서 3개사 체제로 재편됐다.

백재현기자 bria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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