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서울 용산구에 살고 있는 직장인 정상훈(42) 씨는 평소 수입 맥주를 즐겨 마셨지만, 최근 국산 맥주를 마시기로 마음을 바꿨다. 얼마 전 대형마트 할인 행사에서 구입한 수입 맥주 캔 밑에 표기된 날짜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던 것을 발견한 후 찜찜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 씨는 "'생산일자'를 강조하는 국산 맥주 광고를 본 후 무심결에 수입 맥주 생산일자를 확인했다"며 "생산된 지 오래된 맥주였다는 것다는 것을 알게된 후에는 왠지 구입하기 꺼려졌다"고 말했다.
오비맥주가 광고를 통해 카스 맥주의 신선도를 알리는 '야스(YAASS)' 캠페인을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소비자들의 맥주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고 있다. 그 동안 "국산 맥주는 맛 없다"는 전제 하에 무조건 저렴하고 생소한 이름의 수입 맥주를 찾던 이들도 최근에는 맥주의 신선도와 탄탄한 브랜드력을 갖추고 있는 제품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 맥주 불매운동 여파가 더해지며 맥주 지형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29일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맥주 수입액은 약 1억4천673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 줄어든 수치로, 맥주 수입액이 감소한 것은 2009년 이후 10년 만이다. 반면, 국산맥주 매출액은 각 편의점별로 최근 두 자릿수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달부터 일본 불매운동 여파와 하이트진로 '테라'의 강세로 맥주 시장에서 일본 브랜드의 인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대형마트, 편의점 등 수입맥주가 많이 판매되는 유통채널에서는 일본 맥주를 할인 행사에서 제외시키면서 재고가 나날이 쌓여가고 있고, 음식점 등 업소에서도 일본 맥주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편의점 CU에 따르면 이달 1일부터 18일까지 일본 맥주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89.6%나 감소했다. 같은 기간 GS25에서는 일본 판매 비중이 1.8%에 그쳤다. 작년 같은 기간 점유율이 22.1%였던 것과 비교하면 큰 폭으로 급락했다. 관세청 자료에서도 지난달 일본 맥주 수입액은 434만2천 달러로 한 달 전보다 4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맥주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재고를 갖고 있는 대형마트와 편의점들은 울상이다. 국산 맥주는 업체들이 소매점 사정을 고려해 품질유지기한이 임박한 제품을 직접 수거해 교환해주지만, 수입 맥주는 대부분 반품을 잘 해주지 않아 유통업체가 자체적으로 처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편의점은 시장 테스트 상품, 제품 하자 등일 때만 제조업체 측에 반품을 요구할 수 있도록 계약돼 있고, 이를 위반하면 공정거래법상 불법에 해당돼 이번 불매운동으로 일본 맥주를 반품하기는 더욱 어려운 상태다.
이에 일부 편의점 가맹점주들은 일본 맥주 재고를 털어내기 위해 '폐기'로 처리한 후 현금 지급 조건으로 고객들에게 행사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또 할인 행사 제품에 은근슬쩍 끼워넣거나, 자신들이 직접 마셔 재고를 없애는 등 다양한 방법을 펼치고 있다.
수입 맥주를 직매입하는 대형마트는 품질유지기한이 임박했을 경우 가격을 큰 폭으로 낮춰 판매하는 식으로 재고를 처리하고 있다. 지난달 말 이마트 양재점이 품질유지기한이 임박한 '아사히 블랙' 350㎖들이 6캔을 5천 원에 판매하는 단독 행사를 벌인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마트는 불매운동이 범국민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 맥주 할인 판매를 해 뭇매를 맞자, 최근에는 품질유지기한이 임박한 수입 맥주를 '폐기'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처럼 각 유통업체들은 맥주 재고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들이 시기를 놓쳐 '품질유지기한'이 지난 맥주를 판매한다고 해도 사실 법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유통기한(Expiration date)'이 아닌 '품질유지기한(Best before date)'이기 때문이다.
'유통기한'은 제품의 제조일로부터 소비자에게 판매가 허용되는 기한을 뜻하며, '품질유지기한'은 식품의 특성에 맞는 적절한 보존방법이나 기준에 따라 보관할 경우 해당 식품 고유의 품질이 유지될 수 있는 기한을 말한다.
'유통기한'은 기한이 지나면 제품이 부패 또는 변질되지 않았더라도 유통업체에서 제품 판매를 할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돼 있으나, '품질유지기한'은 기한이 지나도 제재할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상태다. 다만 최근 디아지오코리아가 수입·판매한 '기네스 드래프트'처럼 일부 제품에 '품질유지기한'을 표시하지 않고 판매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식품위생법에 따르면 식품 제조·가공업체는 자체 실험을 통해 각 제품의 유통기한을 정하고, 이를 해당 관청에 신고해 승인을 받는다. 이후 업체들이 낸 보고서·사유서는 지방의 식약청이 검토한다.
외국에서는 식품회사가 자율로 정하고 국내처럼 판매할 수 있는 기한인 유통기한 대신 품질유지기한, 소비기한 같은 다양한 표기를 자율적으로 선택해 쓴다. 또 유통기한 위반에 정부가 개입하는 나라가 드문 반면, 국내에선 제조사가 유통기한을 넘겨 판매하면 최대 3개월의 영업정지 혹은 3천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업계 관계자는 "유통기한 표시 방식은 안전성 측면에선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소비할 수 있는 제품마저 폐기를 유도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며 "현재는 보건복지부가 판매할 수 있는 유통기한과 먹어도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품질유지기한을 나눠 표기하도록 하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품질유지기한은 유통기한보다 긴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기간이 지나면 상품의 부패나 변질이 시작될 가능성은 높아진다"며 "품질유지기한이 주로 적용되는 맥주는 유통 및 보관만 잘된다면 미개봉 시 추가 발효나 미생물 문제가 없어 지나도 음용을 하는 데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고 덧붙였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맥주의 품질유지기한은 캔 제품이 12개월, 페트 제품이 6개월로 표시된다. 국산 맥주는 유통기한 대신 품질유지기한이 표기되는데 이 기한이 지난 제품을 판매해도 식품위생법에 따라 처벌받지 않는다. 수입 맥주는 해외에서 표기된 품질유지기한을 수입 업체의 판단에 따라 '유통기한' 혹은 '품질유지기한'으로 표기한다.
식약처 관계자는 "주류라고 해도 일반술은 '제조연월일'만, 탁주나 약주는 '유통기한'을 표시해야 한다"며 "맥주는 사업자가 제품을 어떻게 유통하고 보관할 지에 따라 '품질유지기한', '유통기한'으로 분류해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같은 식품이라도 유통기한을 표시하는 기준을 정한 식품의약품안전처고시를 참고해 영업자들이 이를 결정한다"며 "설정 가이드는 고시로 제시하는 정도"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고시의 유통기한 설정기준에 따르면 맥주에 대한 기준은 모호한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수입 맥주의 경우 일부 국가는 품질유지기한(BBE, BE)으로 표시돼 들어와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는 한국 실정에 맞게 품질유지기한이 아닌 유통기한으로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수입 맥주의 경우 유통기한 표기가 문제가 되는 사례도 종종 발생한다. 지난 2015년 '데스페라도스'를 수입한 하이네켄코리아와 '밀워키 베스트 프리미엄 맥주'를 들여온 사브밀러코리아, '하노이 맥주'를 들여온 미래상사 등이 유통기한 변경 표기 문제로 논란이 돼 식약처의 제재를 받거나, 제품을 모두 회수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업계 관계자는 "알코올 제품인 소주가 유통기한이 없는 것처럼 맥주도 유통기한이 없었다"며 "업계에서 자발적으로 품질유지기한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사용 중으로, 맛을 최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을 정해놓은 것이지 그 이후에 못먹는다는 뜻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품질유지기한이 지났을 경우 처음에 비해 맛이 변할 수 있다"며 "시간이 경과하면서 맥주 내 성분들이 산화반응을 일으켜 처음과는 다른 향과 맛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품질유지기한이 지났다면 교환해 마시는 것을 추천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계자는 "품질유지기한이 지난 제품 중 일부 제품은 폴리페놀 성분과 단백질 성분들이 결합해 침전물이 발생하기도 한다"며 "모두 식품 성분으로 건강상에는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맥주는 알코올 도수 5도 전후의 저도주인 만큼, 고도주와 달리 부패 우려가 커 제조일자와 품질유지기한만 표시하는 것이 미흡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페트 맥주는 재질 특성상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기 쉽고 산소나 탄산가스의 투과가 발생함에도 장기간 판매가 가능하다는 점은 불안요소로 꼽힌다. 실제로 몇 년 전 한 국내 맥주 회사의 일부 제품이 빛 탄산가스 투과에 의한 산화취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유통기한, 품질유지기한을 관리하는 주체는 영업자"라며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이를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그 이상을 영업자에게 요구하게 되면 과도한 규제로 지적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장유미 기자 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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