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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과 소셜 플랫폼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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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읽는 소셜 미디어-5]

[김익현기자] “케네디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트 집에서도 나왔고, 역대 다른 암살범 집에서도 발견됐다.”

멜 깁슨과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했던 영화 ‘컨스피런시’에 나오는 대사다. 이 대사에 나오는 '암살범들의 집에서 발견됐던 책'은 바로 J. D 샐린저의 명작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지금도 미국 도서관에서 많이 대출되는 책 꼭대기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정도로 인기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성을 떠나서도 많은 화제가 됐다.

사이먼과 가펑클, 빌리 조엘 등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이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털어놨을 정도. 실제로 사이먼과 가펑클의 명곡 'I'm a Rock'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모티르를 얻은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숀 코너리가 주연을 맡아 인기를 끌었던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는 '호밀밭의 파수꾼' 발표 이후 은둔 생활을 했던 샐린저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이 정도는 약과다. 영화 대사처럼 미국의 수 많은 암살범들이 이 책을 거론해 더 화제가 됐다.

1980년 12월 8일 발생한 비틀스 리더싱어 존 레논 암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경찰에 체포된 암살범 마크 데이빗 채프먼의 손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쥐어져 있었던 것. 채프먼은 경찰에서 “나는 이 책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라고 주장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존 레논 암살 사건 3개월 뒤 발생한 레이건 전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인기배우였던 조디 포스터에게 구애하기 위해 거사를 벌였던 범인 헝클리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거론한 것이다.

고전으로 읽는 소셜 미디어 다섯 번째 소재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더 정확하게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통해 소셜 플랫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탐구하려 한다.

◆1951년 출간되자마자 미국 젊은이들 사로잡아

‘호밀밭의 파수꾼’은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가 다니던 펜시 고등학교에서 퇴학 당한 뒤 집에 돌아오기까지 사흘 동안 겪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스토리만 놓고 보면 사실 특별할 것 없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열광을 하는 걸까? 무엇보다 주인공인 콜필드가 풍기는 ‘냉소적인 반항아’ 이미지가 작품 출간 당시 시대 상황과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51년. 2차 대전 이후의 음산하고 허무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을 때였다. 기성 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불신이 커지던 시기. 그러다 보니 도덕이란 잣대로 그들을 옥죄어 오는 기성 세대를 향한 반항심도 상당했다.

주인공 콜필드가 불쑥 불쑥 내뱉는 말들은 욕구불만으로 가득찼던 당시 젊은이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주인공 콜필드는 순식간에 ‘냉소적인 반항아’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더불어 작품 속에서 콜필드가 사용하던 어휘는 10대들 사이에서 유행어로 자리잡았다.

서두에 작품 얘기가 좀 길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건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타난 소셜 미디어 현상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 작품을 통해 소셜 미디어 플랫폼 전략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작품을 전체적으로 분석하는 수고를 하진 않으려 한다. 대신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제목이 내포하는 의미 쪽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의 끈을 이어가려고 한다.

◆호밀밭 파수꾼 역할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일단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제목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이를 위해 일단 작품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자. 아래 인용한 것은 “좋아하는 것 한 가지만 말해봐”라고 동생 피비가 채근하자 홀든이 대답하는 장면이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민음사 번역판, 229~230쪽)

어린애들만 가득 있는 호밀밭에 유일한 어른으로 등장하는 꿈 같은 장면. 그곳에서 맘껏 뛰어 노는 어린애들에게 무한 자유를 주겠다는 다짐. 다만 어린애들이 호밀밭 곁에 있는 아득한 절벽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할 때만 어디선가 나타나 재빨리 붙잡아주는 정도 역할만 하겠다는 게 홀든 콜필드의 소박한 꿈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콜필드는 시종일관 어른들의 과도한 간섭에 대해 (속으로) 강하게 반항한다. 콜필드가 학교를 떠나기 전 역사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스펜서 선생과 나눈 대화를 한번 살펴보자.

“인생은 시합이지. 맞아, 인생이란 규칙에 따라야 하는 운동 경기와 같단다.”란 스펜서 선생의 말에 홀든은 “예. 선생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속 마음은 다르다.

“시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축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 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축에 끼게 된다면, 잘난 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편에 서게 된다면 그 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아니. 그런 시합은 있을 수 없다.” (19쪽)

홀든은 또 “어른들은 자신들의 말이 늘 맞다고 생각하니까. 난 그런 일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20쪽) 거나 “어떤 걸로도 선생이 하고 싶다는 일을 막을 수는 없다. 선생들은 뭐든지 그냥 해버리니까.”(22쪽)라고 혼자 읊조린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펜서 선생은 홀든에게 “자네 머릿속에 분별이라는 걸 넣어주고 싶어. 도와주고 싶다는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도와주고 싶어.”라고 말한다. 그러자 홀든은 혼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선생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분명했다. 하지만 선생과 나는 너무나도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27쪽)

◆'붙잡다'에서 '만난다'로 인식 변화, 그 의미는?

이처럼 ‘호밀밭의 파수꾼’ 속엔 사사건건 규제하려드는 세대와 자유를 갈망하는 신세대 간의 갈등이 잘 녹아들어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마자 수 많은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주제가 소셜 미디어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난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많은 이용자들에게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도록 하는 데 온갖 정성을 쏟는 존재. 불필요한 규제나 간섭보다는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존재. 그게 바람직한 소셜 플랫폼 전략이란 얘기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의미는 단순히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상징적인 단어보다 훨씬 더 깊고 넓다. 최근 출간된 ’샐린저 평전’ 저자인 케니스 슬라웬스키는 주인공인 홀든이 동생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홀든: 너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는다면’이란 노래 알고 있지? 내가 되고 싶은 건….

피비: 그 노래는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야. 그건 시야. 로버트 번스가 쓴 거잖아.” (229쪽)

슬라웬스키는 이 장면에 주목한다. 피비와의 이 대화를 통해 홀든 안에 있는 무언가가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그는 설명한다. 좀 길긴 하지만 ’샐린저 평전’에서 이 부분을 그대로 옮겨 보자.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만날 때”를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잡을 때’로 바꾸면서, 샐린저는 시의 함의까지 바꾸어버렸다. ‘위험이 가득한’ 어른들의 세계로 떨어지는 아이들을 ‘잡는’ 행위는 보호해주고, 막아주고, 혹은 금지시키는 간섭이었다. 하지만 ‘만남’은 지지하고 함께 나누는 것, 즉 이어주는 행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홀든의 여정은 번즈의 시를 잘못 인용한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과정이 된다. ‘잡는’ 것과 ‘만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의 투쟁도 끝난다. 그 깨달음은 신의 출현과 같은 하나의 계시가 된다. (304쪽)

그러니까 ‘호밀밭의 파수꾼’은 잡는 것과 ‘만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깨닫는 여정이라는 게 슬라웬스키의 설명이다. 문학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이 설명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부분이 소셜 플랫폼에 대한 전략, 혹은 정책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공유지의 비극'

자, 이제 서서히 글을 맺자. 두 세대 전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은 세월의 더께를 뛰어넘은 고전이다. 지금 읽어도 여전히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셜 플랫폼 전략/정책’이란 목적을 갖고 접근해도 훌륭한 인사이트를 남겨준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화두 속엔 플랫폼 운영자나 정책 입안자들이 새겨 들어야 할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던진 메시지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최근 포털 뉴스 서비스를 놓고 ‘공유지의 비극’이란 비판이 힘을 얻고 있다. 포털들이 언론사를 비판할 때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사실 이런 비판에 대해 언론사 쪽에선 항변할 말이 별로 없다. 뉴스캐스트란 ‘공유지’를 망쳐 놓은 혐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랫폼 사업자들이 ‘공유지의 비극’을 논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지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플랫폼을 펼쳐 놓은 입장에서 '공유지의 비극' 운운하는 건 직무유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여러 사람들의 말을 살짝 비틀어 이렇게 외치려 한다. "우리 모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야 한다." 고. ^_^

김익현기자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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