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야의 협상 결렬로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2년으로 제한한 비정규직법이 7월1일부터 시행돼 '고용불안'이 현실화됐다. 그러나 정치권은 해법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가파르게 대결로 치닫고 있다.
정치권 안팎으로 여야의 조속한 비정규직법 개정안 재협상 요구 목소리는 점차 거세지고 있지만 정치권은 오히려 정쟁으로 빠져들면서 정작 재협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비정규직법 소관 상임위원회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기습 상정하면서 비정규직법 시행 첫날부터 국회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 소속인 추미애 환경노동위원회위원장의 상임위 진행 기피·회피 이유를 들어 비정규직법 개정안 뿐 아니라 147건의 법안을 상정했다. 한나라당이 근거를 둔 것은 국회법 50조5항이다.
50조 5항에 따르면 소관 위원장이 개회 또는 의사진행을 거부·기피하거나 위원회가 활동하기 어려운 때에는 소속 의원수가 많은 교섭단체 간사가 위원장 직무를 대행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추 위원장이 의사진행 의지가 없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자 추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단독 기습상정이 '원천무효'라며 강력 반발했다. 추 위원장은 "사회권을 가진 위원장을 배제한 한나라당의 단독 기습상정은 원천무효"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우제창 원내대변인도 "한나라당의 행위는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고 불법"이라며 "한나라당은 사전에 비정규직 악법을 불법 상정할 것을 모의하고 실행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 소속 환노위 위원들을 윤리위에 제소했고, 형사고발을 검토하는 등 협상의 틀인 환노위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실정. 비정규직법 재협상을 시작도 하기 전 협상 당사자들간 감정싸움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기습상정으로 몰고 올 후푹풍을 모를 리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기습상정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것이었으며, 결국 직권상정 수순밟기 아니냐는 의혹의 시각을 보내고 있다.
당초 정치권에선 비정규직법 뿐 아니라 미디어법도 사실상 정상적 처리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비정규직법과 미디어법 일괄 직권상정을 고려한 계획적인 행동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기습상정으로 비정규직법 논의보다는 우선 기습상정의 법적 실효성 여부를 놓고 여야가 한차례 맞붙을 것으로 보여 사실상 비정규직법 재협상은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다. 결국 여야는 비정규직 근로자를 볼모로 정치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각에선 기습상정으로 민주당 등 야당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기습상정으로 여야 관계는 꼬일대로 꼬여버려 서로 재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기승상정에 앞서 한나라당은 비정규직법 재협상을 위한 여야 3당 원내대표-정책위의장 등이 참여하는 '6자 회담'을 제안했다. 그러나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이 이를 거부했고, 이는 한나라당의 '기습상정'을 예고한 셈이 됐다.
안 원내대표는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지금까지는 상임위 중심으로 간사에게 협상을 맡겨왔지만 지금은 비상상황이어서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정치권은 경제위기라는 특수 상황을 감안해 여야와 이념을 초월해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 일자리 창출을 함께 고민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대량해고 사태 우려와 관련,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힘겹게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주들께 상생의 정신으로 비정규직 근로자들에 대한 해고를 삼가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안 원내대표는 그에 앞서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제6차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모두발언을 통해 "이제 특단의 대책을 강구, 원내대표회담 수준으로 올려서 빨리 타결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은 1일 한나라당이 비정규직법 개정 문제와 관련, 3당 원내대표·정책위의장이 참석하는 '6인 회담' 개최를 공식 제안한 데 대해 거부 의사를 밝혔다.
민주당 우제창 원내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6인 회담 제안은 노동계를 제외한 채 정치권끼리 합의하고 야합하자는 것"이라면서 "양대 노총이 반드시 의견을 개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만 비정규직 문제의 현실적 대안을 만들 수 있다"며 반대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도 논평에서 "3당 간사간 협의도 안되는데 무슨 6인 회담이 되겠느냐"며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려 해서는 안되며, 근본적인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놓고 여야가 정치게임에 돌입하면서 정치권 안팎에서는 법안 처리가 더욱 늦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당장 당내에서도 금명간 비정규직법 처리에 비관적이다. 한나라당 당직자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제부터 여야는 철저히 정치논리로 접근하게 될 것"이라며 "여야가 통큰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선 장기화를 대비해야 한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여야는 비정규직법 협상 결렬로 그렇지 않아도 여론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기습상정으로 인해 정치권을 향한 들끓는 민심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강화론'을 기치로 대운하까지 포기한 마당에 자칫 여당의 강경노선은 이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또한 서민정당을 자처하는 민주당으로서도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어 여론 압박에 의한 여야의 극적 타결도 배제할 수 없다.
/민철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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