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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림]'덕혜옹주' 박해일에게서 멜로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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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장한의 눈빛에 어린 절제된 로맨스

[권혜림기자] 입체적인 이미지와 걸출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들에게 자주 쓰이는 극찬이 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얼굴'. 한없이 맑고 선량해보이던 눈빛이 한끗차이로 속을 알 수 없는 악인의 것이 되는 순간, 관객은 배우의 얼굴에서 반전의 드라마를 읽어낸다.

사실 박해일은 이런 상찬이 가장 잘 어울리는 충무로 배우다. 봉준호 감독의 명작 '살인의 추억' 속 연기는 결정적이었다. 그래서 영화 속 모든 심증이 박현규(박해일 분)를 가리키는 순간에도, 관객은 그를 선뜻 단죄하지 못했다. 이 영화의 짙은 여운을 완성한 것은 다름 아닌 박해일의 얼굴, 말 그대로 선과 악을 절반씩 품은 그의 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박해일이 씹어삼키듯 소화해 온 종류의 인물들은 더 있다. 사랑에 혹은 연애에 처절히 목 매는 청년상, 배운 것은 많지만 좀처럼 현실과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고학력 무직자' 유형이 그 예다.

'질투는 나의 힘'이나 '연애의 목적'에서 보여준 그의 표정은 언젠가 카페에서, 술집에서, 소개팅 자리에서 실제로 목격한 적이 있는 듯 기시감 넘치는 것들이었다. 잘 포장하면 너무도 현실적인, 나쁘게 말하면 그래서 부담스러운 인물들이다. 이 작품들 속 인물들이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조금 더 정적인 순간을 맞이한다면 '경주'의 최현, '은교'의 이적요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괴물'의 남일, '고령화가족'의 인모는 어떤가. 사연을 들어보면 나름의 먹물 냄새가 나는데, 말끔한 인상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 후줄근한 차림새를 했다. 가족이 기대하는 돈벌이엔 재능이 없다는 점도 비슷하다. 돌이켜보면 '나의 독재자'의 태식 역시 남일, 혹은 인모와 다른듯 닮아있었다.

그가 지금 선보이고 있는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신작 영화 '덕혜옹주'다. 일본에 끌려가 평생 조국으로 돌아오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덕혜옹주(손예진 분)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박해일은 영화를 여닫는 화자와 같은 캐릭터 김장한으로 분했다.

극 중 장한은 일제강점기의 독립 투사이자, 광복 후 기자로 일해온 인물이다. 대한제국 황실은 어린 장한과 덕혜를 정혼시켰지만 덕혜는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정체를 감춘 채 일본에서 독립 운동을 도모하던 장한은 그 곳에서 덕혜와 재회하고, 덕혜로 하여금 동포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목도하게 한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감시 아래, 애초 신분의 격차가 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이 아닌 보호와 피보호의 관계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몇몇 장면은 로맨스를 표방한 영화 속 순간들보다 더 절박하고 애틋하다.

특히 장한과 덕혜가 탈출에 실패한 뒤 독립군 은신처에 간신히 몸을 숨기는 장면에선 감독의 의도가 어땠는지와는 무관하게 묘한 긴장감이 팽팽하다. 올곧고 듬직한 장한, 유약해보이지만 극단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으려는 덕혜의 모습 사이엔 비장한 전우애 같은 것이 흐르지만, 서로를 향한 그 이상의 감정 역시 조심스럽게 읽힌다.

보호 대상으로만 보여졌던 덕혜가 장한의 상처를 치료하고, 공주를 지키는 기사 같기만 했던 장한이 "오향장육은 드셔보셨습니까"라는 대사로 덕혜와의 관계를 확장해나가는 순간은 절제된 로맨스라 읽어도 지나치지 않다.

'덕혜옹주' 속 장한의 매력은 은신처를 중심으로 한 이 시퀀스에서 폭발한다. 정중하지만 불필요한 굽힘은 없고, 때로 은유적 언어로 연정 비슷한 감정을 드러내는 장한의 표정은 배우 박해일의 멜로를 기다려 온 관객들에게 단비처럼 다가온다.

살인마, 청년 백수, 늙은 몸으로 젊음을 쓰는 시인, 독립을 갈망하는 투사까지, 박해일의 연기가 평면적인 적은 없었다. '덕혜옹주'에서도 마찬가지다. 선비 같은 장한의 눈에서 찰나에 흐른 멜로의 기운을 읽어낸 관객이라면 동의할 것이다. 그는 '대충 알겠다' 싶으면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배우다. 매 캐릭터에 서린 서로 다른 기운을 읽어내는 재미를 주는 게 박해일의 연기의 품격이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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